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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콤·쌉쌀한 한입, 조선시대 유명했던 밥도둑

호랭™ 2016. 12. 7.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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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콤·쌉쌀한 한입, 조선시대 유명했던 밥도둑

 

조선일보 / 2016-12-07 03:07

 

 

[박정배의 한식의 탄생] [54] 어리굴젓

 

찬바람이 불어야 제맛이 나기 시작하는 굴. 서울 사람들은 매콤하고 짭짤하게 간한 어리굴젓으로 즐겨 먹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햅쌀밥을 한 수저 듬뿍 떠서 미각을 자극하는 싱싱하고 빨간 어리굴젓을 얹어’(1973년 09월 30일자 조선일보) 먹는 밥 반찬이자 ‘저육(돼지고기)이나 업진(양지)편육을 찍어 먹는’(1931년 11월 5일자 동아일보) 소스이기도 했다.

 

음식에 관한 글을 많이 남긴 조선 후기 문신 심노숭(沈魯崇·1762~1837)은 남천일록(南遷日錄)에서 ‘지금쯤 서울 시장에서 파는 어리굴젓(淡酸石花醯)은 내가 즐기는 것으로 늘 생각이 간절하다’고 적을 정도로 어리굴젓은 조선시대에도 유명했다.

 

서울 사람들은 서산 간월도 것을 최고로 쳤다. 홍선표(洪善杓)는 조선요리학(朝鮮料理學·1940년)에서 간월도 어리굴젓을 최고로 꼽으면서 ‘특히 유명한 것이 한해(韓�)이다. 한씨 가문에서 수백년 동안 전해 내려왔는데 독특한 비법이 있어 누구도 흉내 내지 못했다고 한다’고 적었다.

 

어리굴젓이란 말은 맵다는 의미의 ‘어리하다’와 나이가 적다는 의미의 ‘어리다’에서 나온 이름으로 짐작된다. 간월도 굴은 다른 지역의 굴보다 크기가 작다. 그럼에도 간월도 어리굴젓이 유명한 건 작은 대신에 맛이 좋기 때문이다. 간월도 굴은 3년이 지나도 2~3㎝밖에 자라지 않는다. 하지만 굴 몸통에 달린 물날개가 다른 지역의 굴보다 많아 양념이 고루 밴다는 특징이 있다.

 

1980년대 초반 간월도 일대가 간척지가 되면서 간월도 어리굴젓은 사라졌다가 1980년대 후반 지역 주민들이 방조제 바깥쪽에 굴을 양식하면서 굴이 다시 나고, 어리굴젓을 살려야 한다는 주민들의 염원이 합쳐지며 부활한다. 하지만 식생활이 서구화되면서 ‘혓바닥에 짝 들러붙어 군침을 삼키게 한’(1957년 12월 10일자 경향신문) 서울 사람들의 겨울철 어리굴젓 앓이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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