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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이 뛰어나 “차마 삼키기 안타깝다”라는 뜻을 가진 석탄주.

 

여러 문헌을 통해 살펴본 석탄주

이미 사라지고 기록이나 활자로만 남아있는 1천여 종의 전통주 가운데 필자가 맨 먼저 재현에 도전했던 술은 [임원십육지]에 수록되어 있는 ‘석탄향(惜呑香)’이라는 이름의 다소 생소한 주품이었다. 석탄향은 [임원십육지]를 비롯 [음식방문] 등 여러 문헌에서 그 기록을 찾을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대중화되었던 술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시의전서]에는 ‘성탄향(聖呑香)’, [양주방]과 [음식방문],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는 ‘석탄향(惜呑香)’으로 수록되어 있어, 그 특징이 아름다운 향기에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맥이 끊긴 채 활자에 갇혀있는 수 많은 전통주 가운데 특별히 석탄향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우리의 전통음식 가운데 ‘석탄병(惜呑餠)’이란 떡을 맛 본 경험 때문이었다. 석탄병은 궁중음식으로 알려져 왔거니와, 그 맛과 향기가 뛰어나 임금이 드시던 떡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이에 술도 석탄병 못지않게 맛이 뛰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된 것이다.

 

[임원십육지]라는 1820년대의 기록을 토대로 한 석탄향 재현 과정은 정말 고비의 연속이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재현 실패가 거듭되었다. 일차적으로는 양조 자체가 되질 않아 산패하거나 변질되기 일쑤였고 설혹 술이 되더라도 술 이름과 관련된 단서라거나, 술맛과 향에서 석탄향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을 전혀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재현과정의 문제점과 실패원인을 찾기 위해 [임원십육지]를 비롯하여 1800년대 말엽의 [음식방문]과 [시의전서] 등 시대별 다른 고문헌에 등장하는 기록을 비교분석하기에 이르렀고, 1700년대~1800년대 중기의 ‘석탄향’과 1800년대 중기 이후의 ‘석탄향’ ‘성탄향’ 빚는 법을 토대로 재현작업을 다시 시작했다.

 

옛 기록에 등장하는 석탄향 제조방법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백미 두되 곱게 빻아 물 한말에 죽 쑤어 누륵가루 한되와 함께 빚어 넣고 겨울은 7일, 봄가을은 5일, 여름엔 3일만에 덧술한다. 찹쌀 한말 무르게 쪄서 고루 빚어두면 7일이면 술이 익는데, 달고 입에 머금은 채 있고 싶을 뿐 삼키기에 아깝다.”

-[임원십육지]의 ‘석탄향’ 주방문 전문

 

“백미 이승 백세세말하여 물 한말로 죽 쑤어 차거든 가로누룩 한 되 섞어 동절은 칠일, 하절은 삼일, 춘추는 오일 만에 점미 일두 백세하여 무르게 쪄 식거든 밑술에 섞어 칠일 만에 쓰나니라. 달고 가장 좋으니, 입에 머금어 삼키기 아까우니라.”

-[음식방문]의 ‘성탄향’ 주방문 전문

 

“희게 쓴 멥쌀 두되를 물 한말에 죽 쑤어 채워서 가루누룩 한되를 섞어 두라. 봄가을엔 닷새, 겨울엔 이레, 여름엔 사흘 만에 찹쌀 한말을 푹 익게 쪄서 채워라. 차디차거든 먼저 한 술에 섞어 빚어두라. 이레 뒤에 따라 쓰라. 맛이 달고 매와 입에 머금었지 차마 삼키기 아깝다.

-[양주방]의 ‘석탄향’ 주방문 전문

 

기실 한국 최초의 한글 조리서로 알려진 [음식디미방]을 비롯하여 고래(古來)의 술 빚는 법은 대개가 다 이와 같다. 이 짤막한 몇 줄의 문장 속에 역사와 전통이 살아 숨 쉬는, ‘삼키기 안타까운 맛과 향기’의 전통주 비법이 깃들어 있다. 십여 차례에 걸친 실험양조 결과 [시의전서]와 [음식방문]의 술 빚기는 [임원십육지]의 방법과는 같은 술이면서도 사뭇 다른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석탄주나 석탄향, 성탄향이 모두 밑술을 죽으로 빚으면서도 약간씩 차이가 있으나, 덧술은 똑같은 방법인 고두밥만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석탄주는 그 특징이 ‘죽’에 달려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석탄향은 기록에 언급된 바와 같이 정확히 7일 또는 21일(세이레) 후에 오묘한 맛과 사과, 포도 등의 과실향기를 뿜었고, 다시 7일 후에는 보다 달면서도 부드러운 깊은 맛을 안겨주었다. 결국 석탄향은 밑술의 죽을 잘 쑤는 것이 그 요결로, 아홉 번의 실패 끝에 비로소 [임원십육지]와 [음식방문], [시의전서]의 기록대로 “차마 삼키기 안타깝다”는 뜻을 가진 석탄향의 이름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게 되었다.

 

석탄주의 뛰어난 향

어림잡아도 300여년만에 처음으로 재현된 석탄향의 맛과 향기는 사과, 포도와 같은 향취와 꿀물과 같은 단맛, 그리고 ‘혀끝에 착 달라붙는’ 감칠맛을 지녔다. 필자는 왜 이와 같이 아름다운 향기와 부드러운 흥취의 명주들이 사라지게 되었는지 그 배경과 이유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게 되었다. 필자가 술빚기를 30년 가까이 해오면서 이제 새로이 술을 배우려는 제자들에게 입버릇처럼 강조하는 말이 있다. 얘긴즉 “술은 머리로 빚는 것이 아니다.”는 것인데, 대개의 사람들이 양조이론에 지나치게 얽매여 자신들이 의도하는 대로 술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데서 실패를 초래하게 된다. 술 빚기를 할 때는 그 술에 대한 한 가지 생각만 해야 한다. 석탄향과 같이 소위 맛과 향기가 뛰어난 명품주는 주방문에 비법이 있으므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주방문 그대로 술빚기에 임해야 하는 데도 더 맛좋은 술, 향기가 더 뛰어난 향기를 발현하는 술을 만들겠다는 욕심을 경계하라는 말이다.

 

필자가 석탄향 재현에 임하면서 실패를 거듭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17년동안 전국을 답사하며 배우고 터득했던 여러 가지 술빚기 방법들을 석탄향을 빚는 방법에도 그대로 적용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또 술은 자연스럽게 저절로 익기를 기다려 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의도하는 대로 때에 맞추어 익히고자 했으므로, 본래의 술맛도 향도 나질 않았던 것이다. 그러기에 옛 사람들이 경계한대로 ‘술은 어떤 음식보다 빚는 사람의 성격을 닮아간다’는 교훈을 스스로 확인하고 만 것이었다.

 

석탄향의 재현을 계기로 그간 맥이 끊긴 채 사장되고 말았을 전통주들에 대한 복원작업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는데, 주변의 권유로 석탄향을 비롯하여 부의주, 감향주, 하향주, 백수환동주, 동양주 등 재현된 20여종의 재현주들에 대한 시음평가회를 갖기로 하였다. 필자의 연구소에서 4차례에 걸쳐 일반인을 대상으로 시음회를가졌는데, 많은 이들이 석탄향에 대해 ‘향기가 너무 좋고 감미롭다’라거나 ‘진짜 전통주가 맞느냐?’ ‘어떻게 이런 향기와 맛이 날수가 있느냐?’ ‘정말 삼키기 아까운 술이다’ 등 그야말로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우리 전통주의 참맛에 새삼 놀라는 표정이었다.

 

석탄향의 향기를 통해 깨닫게 된 것은 우리 전통주는 ‘곡자향(麯子香)’이라는 표현으로 술향기를 얘기하곤 했는데 왔는데, 사실 곡자향은 누룩향기라 는 뜻으로 그간 우리 전통주를 말살하고 폄하해왔던 일제의 잔재에서 기인된 잘못된 인식이었다는 것이다. 만약 필자의 첫 전통주 복원이 석탄향처럼 뛰어난 향을 가진 술이 아니었다면 우리 전통주에 대한 우수성이나 가치에 대한, 특히 무궁한 잠재적 개발 가능성에 대해 간과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언제까지고 전통주는 농가에서나 구습(舊習)에 따라 세습적 답습과정을 밟아 온 그대로 한 걸음도 발전을 보지 못한 채, 누룩곰팡이와 간장 냄새가 술향기로 인식되고, 시큼털털한 동동주와 막걸리가 전통주의 전부로 인식되고 말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면 등골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전주시와 전통술박물관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국선생선발대회’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고유의 방법에 의한 전통주만을 대상으로 한 시음평가대회이다. 2011년 11월에 있었던 ‘제3회 국선생선발대회’에서 탁주부문 대상 수상 주품이 석탄주였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

 

석탄주 빚는 과정

01) 죽으로 밑술 만들기

02) 죽에 누룩 섞기

03) 밑술 혼화하기

04) 항아리에 안치기

05) 발효된 밑술

06) 식혀둔 고두밥

07) 밑술과 고두밥 섞기

08) 덧술 혼화하기

09) 덧술 안치기

10) 완성된 석탄향

 

박록담
시인, 한국전통주연구소장, 숙대 전통문화예술대학원 교수.

발행일 2012.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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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호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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