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천도교, 이념갈등 넘어설 대안사상 향하여

 

한겨례 / 2009-03-11 17:02

 

 

내달 ‘창도 150돌’ 기념축제

근대 민족 종교 혁명 사상… 일제탄압·정권배척에 쇠락… 경주서 3·1운동 등 퍼포먼스“천도교 사상 재점화 염원”

 


동학 천도교를 창도한 수운 최제우(1824~64)가 1860년 4월5일 득도한 지 150년이 됐다. 반상의 구별이 현저했던 당시, 양반도 천민도 남녀도 차별 없이 모두 한울님을 모시고 있어 모든 사람은 근원적으로 평등하다는 ‘시천주’(侍天主·한울임으로 모심) 의 가르침을 펼친 수운의 사상은 동학 민중항쟁과 3·1 만세운동, 독립운동, 어린이 운동, 여성 운동으로 이어지는 근대사의 첫닭 울음소리였고, 그 뒤에 태어난 증산도, 대종교, 원불교 등 수많은 민족 종교 사상의 시원이었다. 따라서 동학 천도교를 빼고는 한국 근대사를 논할 수 없다.

1926년 <동아일보>가 쓴 ‘조선 종교현황’엔 천도교인 수가 200만명이고, 기독교 35만명, 불교 20여만명으로 기록돼 있다. 천도교 3대 교주인 의암 손병희가 민족대표를 맡아 주도한 3·1 만세운동 때는 2천만 인구 중 천도교인이 300만명이 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현재 천도교인 수는 불과 수만명을 헤아릴 정도로 쇠락했다.
 
‘사람이 곧 한울이니 사람 섬기기를 한울같이 하라’는 사상으로 근대 시민의식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고 봉건적인 왕조와 일제 식민지에 정면으로 저항했던 동학 천도교는 우리나라 수난의 역사 과정에서 그 무게를 고스란히 짊어졌다.
 
당시 봉건적인 반상·적서·남녀 차별을 뒤엎는 혁명적인 사상으로 말미암아 천도교는 처음부터 피를 불러왔다. 수운이 1864년 ‘세상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참형을 당했고, 수운으로부터 대도를 물려받은 뒤 36년간 도를 널리 펼치며 동학혁명을 이끌었던 해월 최시형도 1898년 스승과 마찬가지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동학혁명 때 죽은 동학 교도만 30만명에 이르렀다. 3·1 만세운동 당시 희생된 7천여명 가운데도 천도교인이 가장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민족의식이 강했던 천도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극심했다. 그런데도 해방 때까지도 200여만명의 신도가 있었다.
 
그러나 분단으로 인해 교세가 강했던 북쪽이 떨어져나감으로써 천도교는 쇠락의 길로 들어섰다. 북에서 천도교인들이 설립한 조선청우당은 1948년 3·1절을 기해 남북통일 시위를 모의하다가 실패해 1만7천여명의 간부들이 검거되고, 남한의 이승만 정권도 민족의식이 강한 천도교를 배척했다.
 
천도교는 수운회관 건립비를 지원하는 등 우호적이었던 박정희 정권 때 다시 번창하는 듯했으나 1976년 최덕신 교령, 1997년 오익제 전 교령 등이 잇따라 월북함에 따라 ‘빨갱이’교로 음해되면서 결정타를 맞게 된다.
 
김동환 교령은 “천도교의 쇠퇴로 인해,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한 달 뒤인 4월1일 아우내장터에서 만세를 불렀던 유관순이 마치 선창해 3·1 운동이 일어난 것처럼 보도되는 상황에까지 이르러 선열들 앞에서 머리를 들 수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창도 150돌을 맞아 이념적 갈등을 넘어설 대안적 희망사상으로 동학 천도교의 사상이 다시 떠오를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천도교는 창도 150돌을 맞아 수운이 대도를 얻은 경북 경주시 일원에서 4월4~5일 ‘천도교 천일(天日)기념 대축제’를 펼친다.
 
4일 경주시 일원에서 창도 150돌 기념 행진을 펼치는 것을 시작으로 동학군 마임놀이와 무극대도와 3·1 독립운동 퍼포먼스, 축하공연, 학생문예행사, 학술세미나, 풍물놀이 등 ‘인내천’(人乃天·사람이 곧 한울)사상을 되새길 다채로운 행사를 펼친다.

728x90
Posted by 호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