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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주 기행] (29) 김제 백화주

 

경향신문 / 2005-09-21 16:33

 

 

꽃을 센다. 산하 지천에 널려 있는 꽃이다. 모란 등꽃 절굿대꽃 때죽나무꽃 고들빼기 쥐똥나무꽃 삐삐 싸랑부리꽃 구절초 감국 코스모스…. 오십을 헤아리기도 전에 힘이 팽긴다. 그런데도 100가지의 꽃을 고집한다. 초봄 산수유와 매화로부터 시작된 꽃걷이는 늦가을 국화류인 감국에 이르기까지 연중 셈하듯 치러진다. 오직 백화주라는 술 한동이를 담가내기 위한 고행이다.


상투 튼 훈장 사서삼경 읊는 아이들
백화주를 만나러 가는 날 ‘혼치레’를 했다. 분명 전북 김제시에서 10여분 거리라고 알던 터여서 찾는 길을 만만하게 생각했다. 이 마을 저 마을을 두어차례 헤맨 끝에 “저 길로 가다보면 큼지막한 기와집이 보일껴”라는 촌로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이윽고 나타난 학성강당. 조선 성리학의 전통을 고스란히 이어오고 있는 개인서당이다. 지척에 문명이 법석을 떨고 있지만 이 곳은 여지껏 조선시대 선비들이 학문을 닦던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주심포 팔작지붕의 한옥이 미려하게 펼쳐진다. 훈장은 상투 틀고 치포관을 쓴 채 모시한복을 입고 아이들을 가르친다. 하얀옷을 챙겨입은 아이들의 입에서는 옥구슬 같은 논어 구절이 재잘재잘 기와담장을 넘어 황금벌판으로 퍼져나갔다. 방학 때면 100여명의 아이들이 찾고 요즘은 20명 정도 상주하며 사서를 배운다. 학비는 없다. 훈장은 화석 김수연옹(80). 기호학파의 맥을 잇고 있는 그는 조선 성리학의 뿌리를 고독하게 지켜내고 있다. 유학을 전파하는 일은 화석옹이 하고 서당살림은 막내아들 김종회씨(42)가 맡는다. 40대 도인 종회씨는 백화주를 담글 줄 아는 유일한 사람이다.

세계에서 하나뿐인 술
종회씨는 백화주를 술 중의 술이요, 그중의 극치라고 평했다. 술은 술이로되 들이는 공력과 정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했다. 그 때문인가. 백화주는 이 지구상에 오직 학성강당에서만 맛볼 수 있는 술이다. 판매되지도 않을 뿐더러 자주 빚지도 않는다. 순전히 제사용과 접빈용으로 쓰일 뿐이다. 학성강당을 찾은 날 역시 백화주는 한모금도 구경할 수 없었다. 1년에 쌀 한가마 분량만 술을 빚기 때문이다. 그 양은 60병 정도에 그친다. 학성강당에서 250년 전부터 가양주로 전수된 술은 크게 3가지다. 100가지 꽃을 넣는 백화주와 100가지 약초를 재료로 한 백초주, 백화주와 백초주를 섞은 백초화주다. 그 중에 백화주는 백미라 할 수 있다. 백화주를 완성하려면 최소한 80일이 필요하다. 술을 빚을 때 쓰는 물은 백가지 약초를 바짝 말린 뒤 이를 가마솥에 넣고 청정수를 부어 10시간 달인 것이다. 한방에서 극독약으로 취급되는 초오, 부자, 상륙, 대황 같은 약재들도 한움큼씩 들어간다. 백화주가 극독약을 피하지 않는 것은 상생상극의 조화를 이루도록 음양오행과 사유(보양 보음 보혈 보기)를 조화시키면 약효를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천하 3대명주 중 으뜸
백화주 탄생은 비닐봉지에 일일이 담긴 백가지 마른 꽃잎들이 백초와 함께 세번 발효를 마친 술에 한줌씩 들어가면서부터다. 백초를 구하는 것도 어렵지만 백화를 구하는 것은 더 힘들다. 약초는 살 수 있지만 꽃은 계절따라 활짝 핀 적기에 품을 팔아 따야 한다. 꽃은 건조시키는데 말리면 아주 작아지므로 많이 채취해야 한다. 백가지 꽃은 열거하기도 어렵다. 자생지를 찾아 산과 들을 쏘다녀야 하고 한두송이 꺾어서는 안되며 가장 보기 좋을 때 따야하니 이만저만한 고생이 아니다. 1년내내 약초와 꽃을 모으고 공정까지 합쳐 4차 겹술을 하는 술은 백화주 외에 존재하지 않는다. 종회씨는 “백화주는 죽은 사람도 살려낸다는 송화대력주와 불로주와 함께 천하 3대 명주 중 첫번째로 꼽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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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호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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