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하고 일상적인 음식, 전병(煎餠)
헬스조선 / 2015-08-17 09:30
강원도에 가면 반드시 먹어야 하는 음식이 전병이다. 지역의 별미인 줄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전병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달팠던 서민들의 지친 하루를 달래 주는 음식이었다. 최근에 강원도 화천군으로 취재를 다녀왔다. 강원도까지 왔으니 막국수 한 그릇쯤은 먹어 주는 것이 도리다 싶어 화천군에 있는 ‘유촌식당’을 찾았다. 하고많은 막국수집 중에서 굳이 유촌식당을 찾은 이유는 메밀국수와 동치미국물로만 만들어 내는 순결함 때문이다. 함께 간 일행은 막국수와 함께 마치 습관처럼 ‘도토리전병’을 시켰다. ‘그 맛없는 음식을 굳이 왜….’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궁상스러운 생김새 속의 순정한 맛
막국수에 앞서 도토리전병이 먼저 나왔다. 거무튀튀한 색과 소박하다기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궁상스러운 생김새였다. 경상도 출신인 나는 여태 전병의 맛을 몰랐다. 물론 이 음식과 관련한 추억조차 없었다. 그래도 이왕에 시킨 음식이니 맛이나 보자 싶어 한 점 입에 넣었다. 도토리 가루를 묽게 반죽해 지진 전병이 보드랍게 씹혔다. 옅으면서도 은근한 도토리 향이 입안에 맴돌았다. 이어서 아삭아삭 씹히는 김칫소의 변주가 이어졌다. 무슨 조화인지 그 조합이 푸근하게 느껴져 야무지게 씹었다. 입속에서 건더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생각되는 그 순간에 남는 쌉싸래한 맛은 자신의 존재를 끝까지 각인 시키는 마지막 한방이었다. ‘전병이 이렇게 괜찮은 음식이었나?’ 확인 차 몇 번을 더 먹었더니 어느새 접시만 달랑 남았다. 나는 비로소 전병의 ‘순정한 맛을 아는 몸’이 된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몇 년 전에 읽은 소설을 펼쳤다. 에쿠니 가오리를 비롯한 일본의 대표적인 여류작가 4인이 유럽 음식을 소재로 쓴 단편소설을 모은 <치즈랑 소금이랑 콩이랑>이라는 소설집이었다. 소설집 속 모리 에토가 쓴 <블레누아>라는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프랑스 서쪽 끝 브르타뉴 지방의 브레튼이라는 마을이다. 궂은 날씨와 척박한 토양으로 밀농사조차 힘든 브르타뉴에서는 메밀이 주된 곡물이었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주인공 장은 브레튼 사람들의 주식인 메밀 갈레트를 싫어한다. 장에게 퍼석퍼석하니 밋밋한 맛의 갈레트는 지나치게 인색하기만 한 자신의 인생 같았다. 고향을 떠난 장은 요리사의 길을 걷는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한참이 지나 파리의 유명 레스토랑의 주방장이 되어서야 그도 어쩔 수 없는 브레튼 출신임을 깨닫는다. 결국 아내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온 장은 식사를 제공하는 프랑스식 민박을 운영한다. 민박에서 그가 브르타뉴의 맛으로 고객에게 선보이기로 한 음식은 그토록 싫어한 갈레트였다. 제대로 된 갈레트를 만들기 위해 부모님이 경작하던 메밀밭을 찾은 장은 하얗게 핀 메밀꽃을 만난다. 그리고 소설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 꽃을 손바닥 안에 감싸고, 작고 하얀 꽃잎을 헤아리고는 그대로 통곡해 버렸다.”
소박한 정서 통하는 전병과 갈레트
브르타뉴의 갈레트는 우리네 전병과 닮아도 너무 닮았다. 나는 전병 맛을 알기 전에는 이 소설의 정서나 주인공의 심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하얀 메밀꽃에서 아름다움 대신 슬픔을 보는 눈이 생겼다. 지져 먹는 떡이라는 뜻을 가진 전병(煎餠)은 곡물을 섭취하는 가장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방식이다. 부꾸미, 총떡, 빙떡 등 다양한 이름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얼마나 일상적인 음식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같은 한자를 두고 일본은 ‘센베이’, 중국은 ‘젠빙’이라고 한다. 브르타뉴의 갈레트처럼 멕시코의 ‘토르티야’, 인도의 ‘파라타’ 역시 같은 음식이다. 주된 재료와 형태는 조금씩 다르지만 곱게 빻은 곡물을 묽게 반죽해 지져서 만든다는 본질과, 가장 소박하고 일상적인 음식이라는 정서는 동일하다. 음식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적응하고 변형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전병과 갈레트처럼 때로는 동질감을 발견하는 도구가 될 때도 있다. 그저 맛이 있고 없음에 그치지 않고 음식에 담긴 정서를 헤아릴 수 있다면, 한 끼 식사를 통해 단순히 먹는 즐거움 이상의 만족과 감동을 얻을 수 있다. 부디 올여름 휴가지에서는 그런 경험을 하기 희망한다. 세상 곳곳에는 아직 당신의 부름을 기다리며, 당신의 꽃이 되고자 하는 수많은 음식이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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