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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식의 생활건강 에세이] <32> 영조의 건강관리

 

강원일보 / 2015-10-16 00:33

 

 

 

83세 장수王, 그의 생활 들춰보면… 식탐 절제 현미잡곡밥에 하루 세 끼… 절주 금주령 내리고 술 대신 생강차… 건강검진 한 달 11번씩 52년간 총 7,284회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초등학교 다닐 때 외우던 조선 임금 이름의 머리 글자이다. 임금의 자리는 고되고 힘든 자리이다. 왕좌에 올라 정무를 수행하고, 좋은 음식과 술을 마시고, 여색을 맘껏 즐기는 화려한 생활 뒤에는 견디기 힘든 괴로움이 있는 자리였다. 우선 격무에 시달렸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빽빽하게 짜인 일과를 수행하노라면 녹초가 되었을 것이고, 세상 물정을 모른 채 신하들의 말만 듣고 중요한 판단을 내리려니 정신적으로 받는 스트레스는 오죽 컸겠는가, 그리곤 술과 여자, 이것의 계속되는 반복. 민간에서 하듯 가끔씩 생활에서 벗어나 여행을 하거나, 신나게 운동을 하거나, 그냥 즐겁게 노는 시간이 전혀 없었다. 격무와 운동 부족과 여색과 스트레스. 임금의 자리가 병이 들고 단명하지 않을 수 없는 자리였다.

조선조 27명의 임금은 모두가 병으로 고생하였다. 제일 많은 것이 등창이고 폐결핵, 중풍, 당뇨, 이질, 학질, 성병, 화병 등 여러 가지였다. 병 없이 살다 간 이는 2대 정종(63세)뿐이다. 임금에 오른 나이는 평균적으로 24세이고, 재위 기간은 평균 19.2년이고, 평균수명은 47세이고, 최장 기간 재위한 이는 52년간 임금 자리를 누린 영조이고, 최장수 기록 역시 영조가 83세를 기록하고 있다. 부인이 제일 많았던 임금은 태종과 성종으로 12명씩 두었고, 자식을 제일 많이 둔 임금은 태종으로 29명이나 된다.

그래서, 영조에게 눈길이 간다. 그 감옥 같은 궁궐 속에서 어떻게 하여 83세까지 갈 수 있었나. 마지막에 치매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노령에 맞는 치매는 흠이 아니다. 다 맞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조는 임금이라는 건강 유지에 가장 어려운 위치에서, 대개 40대 후반이면 죽는 자리에서, 모두가 등창이며 폐결핵 등에 걸리는 곳에서, 어찌하여 83세까지 건강하게 살 수 있었을까? 궁금해서 그의 생활을 들춰 보는 것이다.

영조는 선천품부(先天稟賦)가 좋았던 것 같다. 부친인 숙종이 60세로 장수하였고, 어머니 숙빈 최씨도 건강하였다. 부모로부터 장수인자를 받았고, 특히 어머니로부터 강인한 체질을 물려 받았을 것이다. 학문을 즐기고, 어려운 정쟁을 수습해 나가고, 풍성한 수염을 가지고 있는 걸 보면 남자로서 강한 신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64세에 왕비와 사별하고 14세의 어린 왕후를 맞아 부부의 사랑을 끝까지 즐길 수 있었던 것도 강한 신장(腎臟)의 소유자임을 말해 준다. 먹는 것과 요샛말로 건강검진은 어떠하였을까 ?

△ 소식에 잡곡밥

임금은 열두가지 반찬을 갖춘 식사를 하루에 다섯 번 하는데, 영조는 백성의 생활을 이해하고 그것에 맞추려고 반찬 숫자를 절반으로 줄여서, 현미잡곡으로 된 밥과 함께 하루에 세 번, 정해진 시간에 먹었다.

 

△ 절주와 왕성한 미행

곡식 부족 때문에 민간에 금주령을 내려 강력히 시행하였으며, 술 대신 생강차를 마실 것을 권유하였다. 그리고 500회라는 조선조 최다 미행기록을 가지고 있다. 미행을 통하여 백성들의 사정을 알 수 있게 되었을 것이고 운동이 되고 스트레스도 많이 풀 수 있었을 것이다.

 

△ 철저한 건강진단

그는 최다 검진기록도 가지고 있다. 임금은 월 6회 내의원의 건강검진을 받게 되어 있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52년 동안 총 7,284회, 연간 140회, 월 11회, 그래서 월 여섯 번 받으면 되는 것을 열한번이나 받았다. 잔병이 있기도 했겠지만 진찰을 통하여 미리 병을 예방하였을 것이다. 특히 산삼을 많이 먹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산삼은 노령의 면역력을 지켜내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영조가 보여준 남과 다른 활동은 소식/잡곡밥/절주/미행/건강검진이다. 타고난 건강체질에 이런 활동이 겹쳐져서 조선조 임금 중 최장 재위기간, 최장수라는 기록을 만들어 내었을 것이다.

그는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을 받고, 어머니의 출신 성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사도세자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평생 큰 정신적 고통이 있었을 터이지만 이를 잘 극복하였다. 당시의 중앙정치 무대는 오랫동안 쌓여 온 붕당 간의 갈등이 극에 달해 허구한 날 헐뜯고 싸움질만 하고 있었다. 영조는 탕평책으로 정파 간의 싸움을 조정하고 민생을 위한 정치를 펴 당대를 조선조의 중흥기로 만들어 내었다. 그것은 그가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어서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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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호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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