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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제주까지… ‘전통주 대표선수’가 뛴다

 

한겨레 / 2009-12-16 10:06

 

 


전국팔도 우리술 지도… 김포 문배주·홍천 옥선주·전주 이강주·제주 오메기술… 지역의 맛과 향 담아 수백년 동안 ‘주류계 노장대결’
“서울의 참이슬, 강원은 처음처럼, 경북 참소주, 전남 천년의 아침, 부산에서는 시원(C1)….” ‘서민의 술’ 소주는 프로야구 리그와 더불어 오래전부터 지역 주류업체의 연고를 바탕으로 한 ‘전국 리그’를 구성하고 있다. 지역 대표선수를 자처하고 있는 소주는 “우리 동네 소주가 낫다”는 말이 술자리 말다툼의 원인이 될 만큼 높은 자존심을 자랑한다. 그러나 ‘소주 리그’ 탄생 이전부터 지역의 자존심을 걸고 수백년 동안 치열한 대결을 벌여온 ‘주류계의 어르신’이 있다. 멀게는 백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그 이름은 ‘전통주 리그’. 전통주는 알코올 성분인 ‘주정’을 물에 섞어 만드는 ‘희석식 소주’와 달리 누룩(밀·찐 콩 등을 갈아 반죽한 뒤 누룩곰팡이를 피워 만든 술 발효제)으로 빚은 뒤 걸러 만들기 때문에 뿌리부터 다른 리그다. 걸러낸 술의 맑기에 따라 약주와 탁주(막걸리 등)로 구분하는 전통주는 지역마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개성 있는 제조 방식이 있어 마치 ‘올스타전’을 보는 것처럼 화려하다.

■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수도권 리그

서울은 전통주 대표선수로 ‘삼해주’를 내세운다. 십이간지로 셈한 정월의 첫 해일(亥日·돼지날)로부터 12일이 지난 다음 해일, 그리고 그다음 해일까지 모두 세 번에 걸쳐 누룩을 앉힌다고 해 ‘삼해주’라고 이름을 붙였다. 맑고 푸른 빛이 도는 삼해주는 조선 중기 마포 나루터 일대 술집에서 인기를 끌어 술 항아리가 1,000개가 넘었다는 기록도 있다. 평양에서 경기로 남하한 술도 있다. 그 주인공은 ‘문배주’. 술에서 활짝 핀 배꽃 향이 난다고 해 문배주라는 이름이 붙었을 뿐, 배를 원료로 쓰지는 않는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평양 술공장에서 대량생산도 했던 이 술은 1990년대 이후 경기 김포에서 생산되고 있다. 경기 화성에서 먹는 ‘부의주’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동동주’의 원조다. ‘쌀알이 동동 떠 있다’는 뜻의 동동주는 원래는 뜰 부(浮)·개미 의(蟻)자를 쓰는 부의주를 풀어 쓴 말이다. 고려시대 문헌에 부의주를 마셨다는 기록이 있다.

■ 화려한 전통 내세우는 충청·강원권 리그

강원 홍천의 ‘옥선주’는 가문의 효심 덕에 세상에 나온 술이다. 조선 고종 38년 전주 이씨 가문의 이용필씨가 괴질에 걸린 부모를 봉양하고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도려내 고깃국을 끓였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고종은 이씨의 효심을 높이 사 정3품의 벼슬을 내렸고, 이씨는 감사의 표현으로 집에서 빚은 옥선주를 진상해 알려지게 됐다. ‘옥선’은 현재 기능 보유자인 이한영씨의 고조할머니 이름을 땄다. 충남 아산의 ‘연엽주’는 특이하게 연근과 솔잎이 재료로 쓰인다. 술을 빚을 때 마르지 않은 연잎이나 솔잎 등을 넣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병자호란 당시 이완 장군이 병사의 몸보신을 위해 이 술을 빚어 먹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계룡의 ‘백일주’에는 진달래·국화꽃을 넣어 향기를 은은하게 낸다. 충남 서천의 ‘한산 소곡주’는 먹다 보면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취기가 돈다고 해 ‘앉은뱅이 술’이라고도 이른다. 한양으로 과거길에 오른 선비가 목을 축이려 주막에서 소곡주를 먹다가 술맛이 좋아 주저앉은 뒤 결국 과거를 보지 못했다는 일화도 있다. 백제시대부터 빚어 먹었으나 전국적으로 알려진 때는 조선시대 초기다. 누룩을 적게 쓰는 방식 때문에 ‘소곡주’라고 한다. 충북 충주에서는 과거길에 오른 사대부에게 인기를 끌던 ‘청명주’가 있다. 한양으로 향하던 경상도 사대부가 충주에서 청명주 한 잔을 마시면 문경새재 마루턱에 가서야 취기가 가실 정도의 술이었다고 전해온다. 충북 청주의 ‘대추술’은 삼국시대 자리 잡고 있던 이 지역의 토성인 ‘상당산성’ 사람이 빚어 먹던 향토 술이다. 누룩에 대추·인삼을 넣고 찐 쌀밥을 버무려 맛을 냈다.

■ 상류사회 취기를 담은 영호남 리그

경북 안동의 ‘안동소주’는 그 유명세만큼이나 역사도 깊다. 13세기의 안동은 몽고의 쿠빌라이 칸이 일본원정 길에 오르면서 만든 병참기지 노릇을 하고 있었다. 당시 몽고식 소주가 안동에 전해지고, 고려시대 집권층 사이에서도 이 ‘안동소주’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1920년 ‘제비원’이라는 상표를 달고 처음 대량생산이 됐으나, 1962년 순곡 소주 금지령으로 잠시 명맥이 끊겼다. 1990년부터 다시 생산되고 있다. 경북 경주의 ‘교동법주’는 조선시대의 외빈 행사용 공식 건배주다. 당시 문무백관과 사신을 대접하기 위해 빚어 먹던 술로, 빚는 날·방법이 정해져 있다 해서 ‘법주’라는 이름이 붙었다. 절에서 빚어 먹어서 법주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주장도 있다. 전북 전주의 ‘이강주’는 조선시대 중기부터 전라·황해도에서 상류층이 빚어 먹던 약주다. 토종 소주에 배·생강이 들어가서 이강주(梨薑酒)라는 이름이 붙었다. 평양의 ‘감홍로’, 전북 정읍의 ‘죽력고’와 함께 최고의 술로 일컬어졌다. 조선시대 말기 고종이 ‘한미 통상조약’을 체결할 때, 통상 항목 가운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술로 언급되기도 했다. 제주에는 ‘오메기 술’이 유명하다. 술독에 오메기 떡(차조가루로 빚어 삶아 콩고물을 묻힌 제주 지방 향토 떡)을 담가둔 뒤, 윗부분만 떠먹는 술로 제주에서는 ‘청주’라고도 했다. 새해에 세배할 때나 귀한 손님이 왔을 때 내던 술로 전해온다.

 

 


 

주세법 ‘전통주 헷갈려’… 민속·농민주로만 구분해 포괄정의… 주류정책 혼란 탓 ‘술족보’ 아리송
막걸리·동동주·청주…. 여기저기 전통주를 앞세운 술이 넘쳐나지만, 정작 그 술을 마시는 일반인은 ‘주류계의 족보’를 알아보기 힘들다. 전통주의 ‘법적 신분’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우선 우리나라의 주세법을 보면, ‘전통주’의 정의는 명확하지 않다. “전통문화의 전수·보전에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주류, 주류 부문의 전통식품명인이 제조한 주류 또는 농업인·임업인 또는 생산자 단체가 제조하는 주류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주류”로만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류 면허를 부과하기 위해 나눠 놓은 주세법 시행령에는 ‘민속주’와 ‘농민주’의 구분하고 있다. 농민주는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이 추천하는 농·임업인·생산자단체가 스스로 생산한 농산물을 원료로 만든 술”로, 민속주는 “전통문화 전수 보전에 필요하다고 인정해 문화재보호법에 따른 지자체장 등이 추천하는 술”로 규정돼 있다. 안동소주·문배주 등 무형문화재로 등록된 전통주가 여기에 포함된다. 이처럼 주세법이 전통주 시장 전체를 포괄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개선 필요성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소비자가 전통주라고 느끼는 막걸리나 약주 가운데 농민주나 민속주의 개념에 포함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농림수산식품부 등에서는 ‘전통주’를 농민주와 민속주 등을 폭넓게 포괄하는 개념으로 내부적인 정의를 내리고 있다. 전통주의 족보가 복잡한 것은 혼란스러웠던 주류정책에서 비롯됐다. 쌀 부족 등의 이유로 전통주 빚는 것을 금지하는 등 약주·탁주 등 발효주에 대한 정책이 바뀌어 왔다. 앞서 일제 강점기인 1909년부터 주세를 매겼던 우리나라는 1916년부터 약주·막걸리·소주를 전통주로 통일해 지역별 주류 제조업자를 배정하기도 했다. 누구나 빚어 먹던 술이 정부 통제를 받기 시작한 것이다. 8·15 광복 직후에는 외래 술과 밀조주가 성행했으며, 1962년 이후에는 국세청의 발족 등으로 징세를 위한 주류 체계의 개편이 이뤄졌다. 당시 양곡관리법에서 순곡 주정을 이용한 술 제조가 금지되면서 전통주의 상당 수가 생산·판매를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 뒤 주류 면허의 규제가 풀리는 등 1990년대를 넘어서면서 전통주 시장은 다시 명맥을 이을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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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호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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