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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꽃이 피어있는 듯한 백화주와 채주한 청주.

 

 

 

술을 빚는 이의 솜씨와 쌀의 처리방법에 따라 각기 다른 향기를 품어내

한동안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의 전통 발효식품 가운데 하나인 장과 김치를 ‘썩힌 음식’으로 매도한 때가 있었으나, 이제 와서는 현대인들에게 최고의 건강식품이자, 성인병을 예방하는 기능식품으로, 또는 다이어트 식품으로 그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전통주도 예외는 아니다. 전통주가 특정 내국인을 대상으로 할 뿐, 외국인들의 기호에 부합되지 못하고, 수출이 안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로 ‘곡자향(麯子香)’을 든다. 사실 말이 곡자향이지, 우리말로 하면 ‘누룩 냄새’이고, ‘곰팡이 냄새’다. 아무리 술이라고 한들 이 곰팡이 냄새를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으랴. 특히 외국인들의 경우는 더하다. 그들의 음주경향은 우리와는 사뭇 다르다. 주질 평가기준이 ‘향기’를 위에 두고 ‘마시는 술’이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는 모든 음식을 ‘맛’으로 먹는 경향이다. 술도 예외는 아니어서 맛이 으뜸이고 향기는 그 다음이다. 술의 맛이 우선이고 누룩과 메주 등의 발효가 집안과 주변에서 이뤄지다 보니 누룩냄새와 메주냄새에 익숙해지게 되었고, 술에서 나는 누룩냄새를 자연스럽게 여기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양인들에게 있어 곰팡이 냄새는 ‘악취’ 그 자체일 뿐이고, 곰팡이는 식품의 부패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이므로, 한국의 누룩으로 빚은 전통주는 부패된 술 또는 썩은 술로 인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 사과향과 포도향 등 아로마나 부케향, 호프향에 길들여진 외국인들이 누룩곰팡이 냄새나는 우리 전통주를 사주고 마실 리 없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다 보니 우리 전통주는 문제가 많다고 하고, 그 이유를 “전통주라고 해서 ‘옛날 방식’으로 하다 보니 비위생적이다” “집집마다 ‘비법’이라 하여 주먹구구식으로 하다 보니 그때그때 맛이 다르다”는 식으로 폄훼하거나, 원인을 다른 이유에서 찾곤 한다.

 

그렇다면 우리 전통주는 곡자향이 전부인가. 단언코 아니다. 오히려 전통주는 서양 와인의 포도향이나 사과향, 맥주의 호프향 보다 훨씬 아름답고 고급의 과실향기와 꽃향기가 있다. 서양의 술들이 원료가 갖고 있는 자체의 향을 포함하는 것인데 비하여, 우리 전통주는 과실이 아닌 전분질의 쌀과 곰팡이 냄새가 나는 누룩으로 빚은 술임에도 불구하고, 술을 빚는 이의 솜씨와 쌀의 처리방법에 따라 각각 다른 향기를 품어낸다. 이런 향기를 간직한 술을 방향주(芳香酒)라고 하는데, 사과향기를 비롯하여 포도향과 딸기향, 복숭아향, 수박향, 홍시향, 자두향, 연꽃향 등 다양하다.

 

 

백설기 떡. 백설기를 만들어 발효시킨 술은 감칠맛이 뛰어나고 은근한 홍시, 배, 수박, 멜론향이 난다.

 

 

 

1백년 전만 해도 팔도강산에 뛰어난 향의 명주 넘쳐나

다양한 방향을 간직한 전통주가 사라진 배경에는 무엇보다 일제 강점기를 시작으로 80여년간 단절되었던 사실에 기인한다. 이 기간은 밀주단속이 빈번해지면서 속성과 약식의 술빚기가 성행하게 되었는데, 일본의 조선주 폄하정책도 한몫 하게 된다. 특히 일본의 영향으로 ‘조선주의 향기는 누룩향’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고, 일본주 교육에 집중하게 된다. 그 결과 입국과 효모, 조효소제를 사용하여 발효시킨 입국식 개량주들이 등장했지만, 인곰감미료 등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방향으로 치닫게 되었다. 또한 첨단과학과 선진양조기술을 도입하면서도 “현대 양조주들이 일체의 식품첨가물 없이 누룩만을 사용한 전통주의 깊고 그윽한 향기와 오묘하면서도 복잡한 맛에 결코 못미친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전통의 양조법이 외면당하는 이유는, 쌀 씻기를 비롯하여 재료의 다양한 변용, 재료의 혼합방법 그리고 발효방법과 기간 등에서 복잡하고 힘든 과정, 숙성과정이 길다는 점이 단점으로만 치부되어 왔기 때문이다. 물론, 근대에 이르러 식량의 절대부족에 따른 가양주와 밀주 금지 정책의 영향도 적지 않았지만, 문제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빠른 시간 내에 뭔가를 이루겠다는 조급함과 함께 ‘쉽고 편하게’의 편의주의 사고방식으로 말미암아 수천 년을 이어왔던 정통의 술빚기가 외면당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술을 공부하다 보면, 그 재료처리나 술을 빚는 요령, 특히 술독관리를 얼마나 과학적이고 지혜롭게 임해 왔는지를 알게 되고, 술 빚는 일에 임하는 옛 사람들의 정성과 노력, 그리고 술을 대하는 마음자세에 감탄하게 된다. 주지하다시피 우리의 어머니와 할머니, 그 어머니의 할머니들은 지금처럼 체계적인 양조교육이나 합리적 과학적인 식품가공법을 알지도 못했고, 특히 요즘의 미디어나 인터넷에서처럼 정보도 얻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음에도, 오히려 현대인들보다 훨씬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양조기법과 기술을 터득하고 있었다. 굳이 찹쌀이나 멥쌀이 아니라도 저마다의 형편에 맞게 보리쌀과 좁쌀, 수수쌀, 기장쌀과 누룩으로만 빚는 술에서 돌배향이나 사과향, 수박향, 홍시향, 복숭아 향기를 맡을 수 있었고, 솔잎을 넣지 않았는데도 은은한 솔향과 계수나무 향기가 배여 있는 가양주로 하여, 집집마다 술을 잘 빚는 여인의 솜씨는 칭송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쌀가루를 뜨거운 물로 반죽하여 익힌 범벅으로 발효시킨 술은 도수가 높으면서 복숭아, 파인애플의 향이 난다.

죽을 쑤어 발효시키면 포도, 수박, 복숭아 향의 술향기를 얻을 수 있다.

 

 

 

 

그 예로, 지금부터 1백년전만 하더라도 당시의 가양주 형태로 전해오던 우리 전통주들이 얼마나 좋은 향기와 맛으로 주품을 다투었는지, 팔도강산에 명주가 넘쳐났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나면 탄성을 지르게 된다. 실제로 지금은 맥이 끊어진 채로 활자 속에 갇혀 있는 전통주 가운데, ‘과하주’의 경우 일제강점기에도 일본으로 수출까지 하였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이름만 들어도 콧구멍이 벌렁거리고 입안에 침이 고이는 석탄향, 하향주, 인유향, 연화주, 송계춘, 광릉춘, 백화주, 만년향, 만전향, 감향주, 죽엽춘, 유화주, 청감주, 벽향주, 향설주, 무릉도원주, 청명향, 동양주, 녹파주, 경면녹파주, 하시절품주, 경액춘, 적선소주 등 수 없이 많은 고급 청주들이 고유의 향과 색깔, 맛으로 주질을 다투었었다. 

 

수십만 가지가 넘는 전통주 가운데 이처럼 술의 향기나 맛, 술 색깔에서 뛰어났던 명주들은 안타깝게도 자취를 감추었고 일제강점기와 밀주단속시기를 거치면서 서민과 기층민들이나 빚어 마셨던, 원형을 찾아볼 수 없는 막걸리와 동동주가 전통주의 전형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각종 향신료와 한약재에 의한 술향기가 일반화된 양조현실에서 서구의 유명 고급와인이나 프리미엄급 위스키가 갖고 있는 아로마나 부케향과 견줄 수 있는 우리 전통주의 청향(淸香)을 비롯한 방향(芳香)에 대해 운운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까.

 

결론적으로 전통주는 그 근간이 향기 중심의 쌀술이며, 쌀술은 곧 청주라는 근거에 도달한다고 할 것이다. 전통주가 “깨끗하고 신선하며 아름다운 향기로서 청향을 간직한 술”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누룩 냄새만 나는 술이 아니라 다양한 방향을 가진 술이라 인식될 수 있도록 우리 스스로부터 전통주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 할 것이다.

 

 

사라진 전통양조법 중의 하나인 구멍떡으로 술빚기. 구멍떡을 빚어 발효시키면 포도와 사과향의 술향기를 얻을 수 있다.

 

 

 

박록담
시인, 한국전통주연구소장, 숙대 전통문화예술대학원 교수.

발행일  2011.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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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호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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