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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면 연쇄살인극은 이제부터

 

한겨레21 / 2009-04-17 18:07

 

 

1980년대부터 위험성 지적됐으나 지난 1월에야 전면 금지… 재개발 현장 자재 처리가 비극의 가늠자

우리나라에서 석면이 언제부터 쓰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일제 때 조선총독부의 <조선광물지>와 <조선광상조사요보> 등에 따르면, 1945년 광복 당시 전국에 약 28개의 석면 광산이 있었다. 만주사변에 이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30년대 중반부터 전쟁 물자로 사용할 석면을 생산하기 위해 한반도를 뒤져 석면 광산을 찾아낸 것이다. 이때 캐낸 석면은 대부분 일본으로 건너가 국내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30년대 지금의 용산에 아사노슬레이트 공장이 있었고 이 회사는 광복 뒤 한국슬레이트, 벽산슬레이트로 이어지면서 다양한 건축자재를 생산했다. 따라서 일제 때도 많은 수는 아니지만 석면 건축자재 공장이 있었고 여기서 생산된 슬레이트가 국내에서 일부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부산 연산동 제일화학의 비극

광복 이후에는 산업활동이 극히 위축됐고 한국전쟁 등으로 석면 광산은 모두 문을 닫았다. 60년대 중반부터 산업화가 본격화하면서 일제 때 개발됐던 광산 가운데 일부가 다시 문을 열어 80년대 중반까지 가동됐다. 부산과 경남 지역을 중심으로 6~7개 석면 방직업체도 문을 열었다.

새마을운동과 함께 농촌 지붕 개량사업으로 석면슬레이트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금강, 벽산 등 대기업들도 석면 건축자재 생산에 뛰어들었다. 70년대 후반부터 자동차 수요가 늘면서 석면 브레이크 라이닝 생산도 활발하게 이뤄졌다. 또 이때부터 도시에 대형 빌딩들이 우후죽순으로 늘어나면서 천장과 벽에 붙이는 석면 텍스 등과 함께 내화재로 석면 뿜칠(스프레이)이 대거 이뤄졌다. 여기에는 주로 독성이 가장 강한 청석면이 쓰였는데, 청석면은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기 때문에 전량 외국에서 수입됐다.

급증하는 석면 수요를 견디기 어렵게 되자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백석면 등 각종 석면 수입이 꾸준히 늘기 시작해 90년대에는 연간 10만t에 이르렀다. 다시 말해 박정희 정권 시절에 이르러 우리나라도 ‘석면 공화국’의 대열에 오르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사용된 석면의 양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2004년까지 약 200만t이 사용된 것으로 추산하고 있으며 앞으로 여기서 나올 석면 폐기물 양만 2천만t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70~80년대 국내 석면 광산과 석면 제품 제조공장의 작업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당시 노동자의 작업환경에 대해 단편적인 조사가 이뤄졌고 관련 논문이 나와 있다. 필자가 21년 전인 1988년 펴낸 <석면공해-조용한 시한폭탄>에 당시 상황을 엿보게 하는 내용이 소개돼 있다.

“몇몇 공장은 나름대로 석면 분진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흔적이 보였다. 경영주도 석면이 노동자들의 건강에 매우 좋지 않은 물질이며 암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사무실은 경영주나 노동자나 모두 무지한 채로 지내고 있었다. 그들의 무지는 공장과 기숙사가 함께 연결돼 있으며 살림집도 공장과 붙어 있었다는 데서 실감할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곳이 부산 연산동에 있다가 지금은 양산공단으로 이전한 국내 최대의 석면방직 업체 제일화학이었다. 이곳에선 상시 200명 가까운 노동자가 일했다. 지금까지 석면에 고농도로 폭로된 사람만 수백 명에 이른다. 한국 최초의 석면암(악성중피종) 환자가 나왔던 곳도 여기다. 1993년 10월8일치 <한겨레신문>은 이 사건을 1면 머리기사(‘직업성 암 국내 첫 판정-노동부 석면 취급 숨진 노동자 사인 인정’)로 다뤘다. 그 뒤 제일화학에서는 석면폐와 악성중피종 환자가 쏟아져나왔다. 현재 언제 발병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노동자도 50여 명에 이른다. 아직 자신의 몸속에 죽음의 시한폭탄이 장착된 줄 모르는 전직 제일화학 노동자도 수백 명에 이른다. 우리나라 최대의 직업병 사건이 원진레이온 이황화탄소 중독 참사라면 제일화학은 우리나라 최대의 석면 직업병 비극의 현장이다. 제일화학뿐만 아니라 90년대 후반부터 조선소 용접공·의장공, 목공, 기계수리공 등 건설·금속 분야와 지하철을 비롯한 교통 분야 등 다양한 직종의 노동자들이 석면폐암과 악성중피종 따위에 걸려 숨졌다.

광산에서 석면 원석을 폭약으로 터트려

우리나라에서도 석면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와 사용 중단을 요구하는 지적은 80년대 후반부터 있었지만 정부는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석면을 비용 면에서 대신할 대체재가 적다는 이유와 안전하게 관리만 하면 된다는 캐나다 등 석면 수출 국가의 로비에 밀려 작업환경 기준 등만 강화한 채 석면 사용을 금지하지는 않았다. 일부 유럽 국가는 90년대 중반부터 자국민의 건강 보호를 위해 모든 석면에 대해 수입·제조·사용 금지 조처를 발빠르게 내렸다. 유럽연합은 99년 7월 모든 회원국에 2005년 1월 이전까지 의도적으로 첨가한 석면 제품과 석면 섬유의 사용 및 무역을 금지토록 했다. 현재 전세계 40여 개 국가가 석면의 사용을 전면 금지하고 있다. 일본도 2006년부터 석면 사용을 금지했다. 유럽연합과 일본의 조처에 영향을 받은 한국도 지난 1월부터 국내에서 석면 사용을 전면 금지했다.

하지만 ‘침묵의 살인자’, ‘조용한 시한폭탄’이라는 별명을 가진 석면의 연쇄살인극은 이제부터다. 지난 1월 정부가 석면 광산이 여럿 있었던 충남 홍성과 보령 지역 주민 210명을 조사한 결과 110명이 석면 관련 질환에 걸린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었다. 이들은 일제 때, 그리고 60~80년대 재가동 때 석면 광산에서 일하다가 또는 바로 인근에 살다가 석면먼지에 노출돼 피해를 입은 것이다. 충남에 이어 충북 제천에서도 과거 석면 광산에서 일하다 그 지역에 거주하던 주민 가운데 피해자가 일부 나타났다. 특히 충북 제천 수산면에서는 석면 광맥이 발달한 곳에 대규모 채석장 허가를 내줘 이 채석장이 석면 원석을 폭약으로 터트리고 석면 광석을 잘게 부숴 석면먼지를 마구 날림으로써 주변 지역을 심각하게 오염시키는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었다. 석면 안전 불감증과 무지, 그리고 행정당국의 안일함이 낳은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최근 몇 년 전부터 서울을 비롯해 주요 도시에서는 재개발, 재건축, 건물 개·보수가 잇따르고 있다. 서울만 해도 삼성 본관 빌딩, 정부광화문청사, 대우빌딩 등 많은 곳에서 건물 개·보수가 이뤄지고 있으며 뉴타운 사업도 계속되고 있다. 재건축도 반포, 잠실 등 곳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70~80년대에 지은 건물의 대부분에는 석면이 건축자재로 쓰였기 때문에 완벽한 해체 제거가 이뤄지지 않으면 작업하는 노동자는 물론이고 인근 주민까지 석면 피해를 입을 수 있다. 농촌의 석면슬레이트를 비롯해 석면이 가장 많이 쓰인 건축자재(80~90%)를 얼마나 안전하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30~40년 동안 발생할 석면 피해자 수가 달라질 것이다.

이 분야야말로 녹색 신성장 산업

최근 정부도 석면이 지닌 시한폭탄의 성격을 잘 알고 있어 범정부 차원의 대책을 마련하고 협의회 등을 통해서도 논의하고 있다. 하지만 부처 간 협조와 정보 교환, 그리고 해체 제거 업체와 석면폐기물 처리업체와의 원활한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안전한 석면 제거는 미래의 국민 건강을 지키기 위한 필수 요소다. 이 분야야말로 우리가 가장 빨리, 많은 비용과 인력을 투입해 국민의 안전과 쾌적한 환경을 보전하고 일자리도 창출할 수 있는 녹색 신성장 산업이다. 최근의 베이비파우더 석면 검출 사건은 석면이라는 광물이 지닌 특성을 미처 생각지 못한 가운데 일어난 후진적인 식품의약품 행정의 결과였다. 우리는 이를 아시아, 나아가 세계에서도 가장 훌륭한 석면 추방국으로 이름을 드높이는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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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호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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