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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년 전만 해도 인간의 평균수명은 불과 20~30살에 불과했다. 태어난 아이 10명 중 3명은 1살도 되기 전에 사망했으며, 절반 정도가 10살 이전에 사망했다. 그 이유는 천연두, 홍역, 말라리아, 콜레라, 이질, 설사, 폐렴, 패혈증 같은 질병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인류는 질병의 원인을 알지 못했다. 기껏 귀신의 저주이거나 나쁜 공기에 의한 것이라고 짐작했을 뿐이었다. 인간이 걸리는 질병의 대부분이 미생물 때문이란 사실을 밝힌 사람은 파스퇴르와 코흐였다.

 

 

대부분 질병의 원인은 미생물

미생물에 의한 질병으로부터 인류를 구하기 위한 노력은 예방과 치료 두 가지로 형태로 발전했다. 이중 예방법은 좀 더 빨리 등장했다. 1796년 에드워드 제너는 천연두를 막기 위해 우두를 만들어 최초로 예방접종을 했다. 하지만 당시 제너가 예방접종의 원리를 알아낸 것은 아니었고, 1885년이 돼서야 파스퇴르가 원리를 알아냈다. 그는 광견병 예방접종을 만들면서 균의 독성을 약화시켜 주입하면 우리 몸에 면역력이 생긴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원리에 입각해서 홍역, 풍진, 볼거리, 소아마비 등의 예방접종이 계속 개발됐다.

 

그러나 미생물을 직접 억제하거나 죽이는 항생제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먼저 특정 질병은 특정 병원균 때문에 생긴다는 이론이 확립됐다. 그중 독일의 에를리히는 매독균을 억제하는 특효약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무려 606번의 실험 끝에 비소화합물인 살바르산 606호를 만들어냈다. 당시 매독 치료제로 썼던 수은은 부작용이 많고 효과는 적었는데, 살바르산은 화학요법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최초의 사례였다. 그러나 여러 항생물질은 인간에도 해롭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런 점에서 페니실린은 인체에 비교적 해롭지 않은 항생물질이라는 점에서 놀라운 것이었다. 진정한 의미의 ‘기적의 약물’인 항생제는 영국의 알렉산더 플레밍이 찾아냈다.


예방접종의 원리를 알아낸 루이 파스퇴르.

 

 

행운이었지만 행운만은 아니었다


플레밍은 1881년 스코틀랜드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3세에 런던으로 가서 안과의원을 개원하고 있던 형의 집에서 폴리테크닉 공업학교를 졸업한 뒤 의학공부를 하기 위해 세인트 메리 의과대에 들어갔다.

 

포도상구균을 기르던 배지에서 곰팡이가 떨어진 부분 주위로 포도상구균이 녹아 있다.(왼쪽)

플레밍은 푸른곰팡이(오른쪽)에서 나온 물질이 포도상구균을 죽였다고 추정했다.

 

 

플레밍은 미생물학자가 됐다. 그는 페트리접시라는 특수한 배양접시에 미생물을 키우면서 미생물의 성장을 억제하는 물질을 찾아내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런 연구를 통해 눈물에서 추출한 라이소자임이라는 효소가 몇몇 박테리아의 성장을 억제한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

 

종종 위대한 발견에는 행운이 따르는 법이다. 플레밍이 일하던 실험실의 아래층에서는 곰팡이를 연구하던 라투슈가 실험을 하고 있었다. 1928년 여름 플레밍은 포도상구균을 기르던 접시를 배양기 밖에 둔 채로 휴가를 다녀왔다. 휴가에서 돌아온 플레밍은 페트리접시를 확인하던 중 푸른곰팡이가 페트리 접시 위에 자라있고 곰팡이 주변의 포도상구균이 깨끗하게 녹아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냥 재수 없는 일이라고 넘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곰팡이가 포도상구균의 성장을 막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가 평소 항균작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런 해석을 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푸른곰팡이의 대부분은 페니실린을 만들지 못하고 오직 페니실리움 노타툼(Penicillium notatum)만이 페니실린을 만든다. 그리고 이 특별한 곰팡이는 아래층의 라투슈의 연구실에서 올라와 플레밍의 페트리 접시에서 자리를 잡고 자란 것이었다.

 

페니실린을 상용화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실험에 몰두 중인 플레밍.


플레밍은 문제의 곰팡이를 배양했다. 그리고 배양된 곰팡이를 새로운 액체 배지에 옮기고, 다시 1주일이 지난 뒤 배양액을 1,000분의 1까지 희석했는데도 포도상구균의 발육이 억제됐다. 이로써 곰팡이가 생산해 내는 어떤 물질이 강력한 항균작용을 나타낸다는 점이 확실해졌다. 그 곰팡이는 페니실리움(Penicillium)속에 속했으므로 그 이름을 따서 곰팡이가 만든 물질을 페니실린(penicillin)이라고 불렀다.

 

페니실린은 포도상구균 외에도 여러 종류의 세균에 대해 항균작용을 나타냈다. 특히 연쇄상구균, 뇌수막염균, 임질균, 디프테리아균 등 인간과 가축에 무서운 전염병을 일으키는 병원균들에 효과가 컸다.

 

이와 더불어 페니실린이 다른 약물들에 대체로 취약한 인간의 백혈구에 전혀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점과 페니실린을 생쥐에 주사하여도 거의 해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플레밍은 이듬해인 1929년 연구결과를 ‘영국 실험병리학회지’에 발표했다. 그러나 플레밍을 실망시키는 실험 결과들이 연이어 나오기 시작했다. 플레밍이 토끼의 혈액 속에서 페니실린의 항균력을 측정한 결과 그 효과가 30분도 지속되지 않았다. 또 동물 장기를 세균이 포함된 용기에 넣었다가 다시 페니실린 용액에 담그자 동물 장기 표면의 세균은 멸균됐으나 장기 내부의 세균은 남아 있었다. 플레밍은 페니실린이 조직 내부로 침투하지 못한 것으로 보고 그만 페니실린 연구를 포기할 생각까지 했다. 또한 페니실린 상용화에는 중요한 장애물이 있었다. 바로 페니실린을 약품으로 정제하는 것. 곰팡이를 직접 인간에게 투입할 수는 없기 때문에 페니실린을 정제해야 하는데 플레밍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페니실린 상용화까지


플레밍의 위대한 발견은 오스트리아 출신 플로리와 유대계 독일인 체인 덕분에 사장되지 않고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1935년 옥스퍼드 대학의 병리학교수로 발령받은 플로리는 곧 체인을 화학병리학 실험 강사로 채용했다. 플로리는 전부터 눈물과 침 등 점액에 들어 있는 라이조자임에 관한 플레밍의 논문에 관심이 있었다. 플로리는 1937년 체인과 공동으로 라이소자임을 정제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라이소자임을 연구하는 동안 항균물질에 대한 논문을 많이 읽었는데 특히 플레밍의 페니실린 논문을 읽고 흥미를 느꼈다.

 

1939년 플로리와 체인은 미국의 록펠러 재단에서 연구비를 받아 페니실린 연구에 착수했다. 반년 동안의 노력 끝에 페니실린을 정제하여 결정을 얻는 데 성공하였다. 그들은 정제된 페니실린을 가지고 동물 실험을 시도했다. 연쇄상구균에 감염된 10마리의 쥐를 두 집단으로 나눠 5마리에는 페니실린을, 5마리에는 가짜약을 투여했더니 페니실린을 맞은 쥐들만 살아남았다. 그들은 동물 실험을 거듭해 1940년 의학 저널 ‘란셋’에 페니실린이 강력한 전염병 치료 효과를 갖고 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이제 남은 것은 인간 대상의 임상시험뿐. 이듬해인 1941년 인간에게 최초로 페니실린이 투여됐다. 패혈증으로 회복 가능성이 전혀 없는 앨버트 알렉산더에게 페니실린 200mg이 투여된 것이다. 페니실린은 3시간 단위로 투여됐는데 그 효과는 놀라웠다. 24시간도 안 되어 알렉산더의 상태가 눈에 띄게 좋아진 것이다. 체온이 정상으로 떨어지고, 곪아가던 상처가 낫기 시작했으며 입맛도 돌아왔다. 사람들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엿새 만에 임상약이 떨어지는 바람에 알렉산더는 사망했지만, 이 임상시험은 인간이 미생물과의 싸움에서 엄청난 무기를 획득했다는 사실을 세상에 확실하게 알린 사건이었다.


페니실린이 작용하는 부위는 미생물 세포의 세포벽이다. 세포벽이 유지되려면 펜타글리신 연결이 필요한데 페니실린은 펜타글리신 합성을 막는다. 세포벽에 구멍이 뚫린 세포는 삼투압으로 ‘터져’ 죽게 된다.

 

페니실린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상용화에 성공해 1943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1944년부터는 민간에도 사용돼 수많은 전염병 환자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페니실린의 개발자인 플레밍과 함께 플로리와 체인은 194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발행일 
2011.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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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호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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