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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은의 명품 먹거리] 소곡주 그윽한 술맛보다 백제의 향기에 먼저 취하다

 

한국일보 / 2008-03-29 03:33

 

 

지난 주 본 칼럼의 ‘명품 먹거리’로 400년 된 일본 과자를 소개한 바 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좋은 술을 마시게 되었다. 2~3년 전쯤 선물로 받아 맛을 보았던 ‘한산 소곡주’를 다시 맛볼 기회가 생긴 거였다. 술맛에 취해 그냥저냥 지나칠 뻔하다 문득 떠오른 생각. “아, 이 맛은 천오백년이나 되었잖아!” 일본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그들의 흔적이 아직 오사카(大版) 등지에 선연히 남아있는, 나라가 멸망하면서 일본으로 건너가 그들의 조상이 되었다는 백제인들의 술. 오늘은 천오백년 묵은 백제의 소곡주를 이야기하련다.

● 한산 소곡주
백제의 궁중 술이었다고 전해지는 한산 소곡주. 지금도 소곡주가 빚어지고 있는 충남 서천군 한산면은 백제 때부터 명주의 본산으로 이름난 마을이었다. 한산면 호암리에서 소곡주 명인으로 무형문화재 지정을 받으신 분이 고 김영신님. 그 옛날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을 함락하자 백제의 풍 왕자가 주류성에 머물며 부활을 꾀하였고, 그 주류성이 있던 산자락이라 전해지는 서천군 한산면이 고향이셨다. 혼례를 올린 후, 부군과 함께 고향에 돌아와 살게 되면서 그녀의 소곡주 전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1970년대에 이미 잔치집마다 돌아다니며 술을 빚어 주었을 정도로 동네에서는 소문난 명인이었던 김영신님의 술은 줄 서서 기다려야 맛볼 수 있었단다. 항아리 100개를 묻고 석달을 기다려야 했기에 독을 여는 날에는 집 앞은 술 기다리는 인파로 북적거렸다고. 1979년 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받으셨지만, 당시만 해도 국내에서는 쌀이 모자라던 시절. 먹기에도 빠듯한 쌀로 빚은 맑은 술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귀하디 귀하기만 했다. 올림픽을 치른 후 쌀 공급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할 무렵인 1990년부터 주류 제조 면허를 취득, 김영신님 일가로부터 한산 소곡주는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고구려에는 계명주, 신라에는 교동 법주가 있어 삼국삼주(三國三酒) 시대였던 무렵, 백제의 소곡주는 훗날 일본 사케(청주)의 모태가 되었을 만큼 그 영향력이 컸다. 그 이유가 무얼까 궁금하다면 맛을 보면 된다.

● 소곡주의 눈물
와인이 잔을 타고 흐르는 모양을 흔히들 ‘눈물’이라 부르는데, 소곡주도 눈물이 있다. 일부러 물컵 크기의 유리잔에 따라 마셔보면 안다. 잔을 기울여 한 모금 하고, 다시 잔을 원위치시키면 끈적하게 흔적을 남기는 소곡주의 눈물. 바로, 술의 농도가 진하다는 증거다. 꺼룩하게 충분히 발효시켜 만드니 그렇다. 한산 소곡주의 재료로는 지역 농민과의 계약재배를 통해 얻는 100% 국내산 찹쌀과 멥쌀. 여기에 야생 국화와 메주콩, 생강, 엿기름, 고추 등이 더해져 향을 돋운다. 순 전통의 방법으로 담기 때문에 화학첨가제나 당분은 일체 섞지 않는다. 고 김영신님의 며느리 우희열 여사와 우 여사의 아드님이자 ‘한산 소곡주’(041-951-0290) 대표를 맡고 있는 나장연 사장의 고집이다. 당을 섞지 않고 전통적인 ‘누리기’를 통해 발효에 이르게 하며, 효모를 인위적으로 주입하지도 않는다. 자연발효를 따르지 않고 억지로 효모를 넣으면 술이 ‘써진다’고 한다. 환경의 변화로 농산물의 맛이 변했고, 누룩의 맛이 변했기에 더욱이 믿을 수 있는 쌀로만 담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다 보니 턱없이 높아지는 재료비. 찹쌀 80㎏, 멥쌀 20㎏, 누룩 30㎏으로 한 독을 담그는데, 그걸로 얻어지는 술은 고작 70리터 남짓. 마음 졸이며 석달을 기다린 항아리 앞에 모자가 쪼그려 앉아 용수를 하는 순간, 그 분위기는 진지하고 진실하다. 대나무로 만든 용수통을 독 중앙에 푹 꽂으면 밥알이 걸러지면서 맑은 술만 가운데로 퐁퐁 솟아오르는데. 잘 익은 술은 색깔이 누리끼리하고, 덜 익은 술은 뿌옇게 떠올라 그 때깔만으로도 술맛을 알 수 있단다. 자식 낳듯이 빚고 기다려 얻어내는 소곡주. 하루도 긴장을 풀지 못하는 정성과 사랑으로 깊이 익으니 잔을 타고 눈물이 흐를 만큼 진할 수밖에.

 

● 21세기형 명품 먹거리
전 세계적으로 명품 먹거리의 가치가 무한 상승하고 있다. 프랑스의 아무개 농부가 재배한 아스파라거스는 안심 한 덩어리보다 비싸고(진짜다), 이탈리아의 아무개 농장에서 짜 낸 올리브유는 유럽 각국 정상들이 아껴 먹는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제는 먹거리에서 더 나아가 ‘누가 만든 먹거리냐’가 화두라는 것이다. 재배자, 양조자가 브랜드가 되고 있다. 그렇게 1차 산업이 업그레이드되고 있는 과도기에 우리가 있다. 서천으로 내달려 한산으로 들어가 만나 뵌 우희열 여사와 나장연 사장. 20대 후반 젊은 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얼떨결에 고향에 돌아와 소곡주 전수에 뛰어들게 된 용기가, 이제는 40대에 접어들어 가업을 당당히 이어가는 의지가 멋지다. 이렇게 한산 소곡주의 메이커(Maker·말 그대로 만든 이)가 믿을 만하다. 믿음직한 메이커가 만든 상품은 세계적으로 适ㅉ濱?것이 추세인데, 정작 국내에서는 서양에서 수입한 와인의 열풍에 비해 그 수요가 미미하다. 자랑스러운 우리 술을 마시고 사랑하는 것은 이렇게 우리 몫으로 남는다. 한산 소곡주, 전주 이강주, 여산 호산춘, 진양주, 문배주 등 역사 깊고 맛 좋은 술이 우리에게는 이미 있다. 우리가 찾지 않고, 챙기지 못한 오랜 세월 동안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있어 주었다. 고집 센 메이커들이 고생으로, 마음으로 지켜주었다. 이제 그들의 술을 와인 마시듯 천천히 향기 맡고, 천천히 시음하면서 일일이 ‘테이스팅’해 보고 싶지 않은가.

소곡주와 푸드 매칭

쌀을 순수 발효시켜 얻는 소곡주를 처음 마신 이들은 비교적 단맛의 술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거푸 마시다 보면 결코 단맛이 다가 아닌, 넓게 퍼지는 국화 향과 고추와 생강이 바탕을 이루는 숨겨진 감칠맛을 찾아 낼 수 있다. 모든 한식 메뉴와 멋들어지게 어울리지만 간장, 참기름, 다진 파와 마늘, 설탕, 깨소금에 소금, 후추를 더하여 양념한 육회에 잣가루를 뿌리고, 배와 곁들여 소곡주와 먹었더니 끝내주는 조화였다. 또 미나리 반 단에 붉은 고추 좀 썰어 넣고, 부침가루와 물을 더해 술술 풀어 부쳐 낸 미나리 부침과도 그 향기가 맞아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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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호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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