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치마 두른 과학, 추석을 요리하다
조선일보 / 2015-09-26 03:01
바삭바삭 하면 인간은 왜 못참나… 과학적으로 만드는 음식천국… 사이다 넣으면 ‘전’ 바삭해져… 먹을 땐 신나는 음악 틀어라
튀김을 좋아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문화인류학자 존 앨런에 따르면 야생에서 쉽게 영양분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 곤충이었기 때문에 바삭한 식감에 대한 선호가 진화 과정에서 인간에게 각인된 것이다. 튀김 반죽에 탄산가스가 들어가면 튀김이 더 바삭해진다. 하지만 맥주나 사이다를 튀김옷에 넣으면 탄산가스가 금방 날아간다. 이때 거품 만드는 기구인 휘핑기에 튀김옷을 넣고 탄산가스를 주입하면 탄산가스가 재료 안에 갇혀 튀겼을 때 가볍고 바삭한 식감을 준다.
추석(秋夕)은 뇌에 각인(刻印)된 고향의 맛을 풀어놓는 날이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송편을 빚고 제철 과일과 생선, 나물 등으로 풍성하게 차린 음식을 나누다 보면 세파에 시달린 고단함도 사라진다. 이날만큼은 허리띠의 속박에서도 벗어난다. 명절에 먹는 한 끼 열량은 성인의 하루 섭취 권장량을 훌쩍 넘긴다. 병원에서는 동맥경화증 환자의 예기치 못한 사고에 대비해 차례상의 칼로리 구성표를 만들어 배포할 정도다.
농촌진흥청은 차례 음식을 고칼로리에서 저칼로리로 바꿀 방법을 제시했다. 이를테면 송편을 멥쌀 가루로만 반죽하지 않고 쑥을 같이 넣으면 칼로리를 9% 정도 낮출 수 있다. 탕류에 들어가는 쇠고기를 양지 대신 사태로 바꾸면 1회 식사 분량당 칼로리를 약 10% 줄일 수 있다고 한다. 고사리나물은 무치면 기름에 볶을 때보다 35% 칼로리를 줄일 수 있다. 예열된 팬에 기름 대신 물을 두 큰 술 두르고 센 불에서 재료를 볶은 후 참기름을 몇 방울 떨어뜨리는 저칼로리 볶음법도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맛은 그대로 두고 칼로리만 낮추는 완벽한 비결은 나오지 않았다. 만약 우리나라에 프랑스 국립농업연구소의 화학자 에르베 티스 박사와 옥스퍼드대 물리학자 니콜라스 쿠르티 석좌교수가 있었더라면 사정이 달라졌을 것이다. 해마다 추석이면 TV와 신문에 나와 ‘과학적 추석 요리법’을 설파했을 테니 말이다.
요리와 과학의 결합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실험실과 주방의 구분이 사라지고 있다. 1988년 티스와 쿠르티는 음식을 분자 단위에서 물리학적, 화학적으로 분석하는 새로운 연구 분야를 창시했다. 바로 ‘분자 물리 미식학(Molecular and Physical Gastronomy)’이다. 1998년 쿠르티가 사망한 후에는 줄여서 분자미식학으로 부르고 있다.
쿠르티는 생전 “금성의 대기 온도를 측정할 수 있는 문명이 수플레(계란 흰자로 만든 요리)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른다니 슬프지 않은가”라고 탄식하면서 연구를 시작했다. 그들은 실험실에서 하듯 정밀 측정부터 시작했다. 달걀과 고기의 단백질이 온도가 높아지면 어떻게 변하는지 1℃ 간격으로 확인한 것이다. 그 결과 진공 내열 비닐 팩에 고기를 담고 끓는 물에서 온도를 1℃까지 조절하는 새로운 조리법이 나왔다. 요리사들도 과학이 가져다 준 새로운 세상에 환호했다. 스페인의 ‘엘불리(elBulli)’, 영국의 ‘팻덕(the Fat Duck)’, 미국 시카고의 ‘노마(Noma)’ 등 분자미식학에 바탕을 둔 분자 요리를 선보이는 식당이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요리사들은 주방에서 실험 기구를 쓰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실험실을 찾기도 했다. 미국 워싱턴 ‘미니바(Minibar)’의 요리사 호세 앙드레는 MIT 존 부시 교수와 함께 수생식물이 꽃을 피우는 과정에 담긴 유체역학을 모방해 액체가 담긴 꽃잎 모양의 젤라틴 요리를 개발했다. 하버드대는 매년 ‘과학과 요리’라는 대중 강연 시리즈를 개최한다. 분자미식학의 선구자인 엘불리의 요리사 페란 아드리아는 여기서 분자 요리를 시연하고 그에 담긴 과학을 소개했다.
네이선 미어볼드는 과학자에서 요리사로 변신했다. 프린스턴대 이론물리학 박사인 그는 영국의 호킹 박사 밑에서도 연구했다. 나중에는 마이크로소프트(MS) 최고기술경영자(CTO)를 지냈으며, 특허 전문 업체 인텔렉추얼 벤처스를 창업했다. 지금도 고생물학 연구로 국제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하는 현역 과학자이자 기업가이지만, 2011년 분자미식학 전문 요리 서적인 ‘모더니스트 요리(Modernist Cuisine)’를 펴내 요리사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분자미식학은 2000년대 중반 이후 약간 시들해진 느낌이다. 최근 이런 분위기를 뒤집은 과학자와 요리사들이 등장했다. 요리법을 넘어 음식을 먹는 환경과 사람 내부에서 일어나는 변화까지 연구하는 ‘미식물리학(Gastrophysics)’과 ‘신경미식학(Neurogastronomy)’이다. 영국 옥스퍼드대의 감각교차연구소는 음식에서 어떻게 서로 다른 감각이 결합하는지 연구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심리학자인 찰스 스펜스 교수와 요리사인 샤를 미셸은 모난 음식은 먹는 사람에게서 먼 방향으로 놓고, 높은 음은 단맛을 높이며, 포크가 무거우면 음식 맛이 더 좋아진다는 연구 결과를 쏟아냈다. 최근에는 맛에 오감(五感)이 모두 관여한다는 점을 한껏 활용한 ‘완벽한 햄버거’ 요리법도 공개했다.
요리를 통해 과학도 달라지고 있다. 영국 브리스톨대의 물리학자 피터 바햄은 ‘네이처’지 인터뷰에서 “요리는 즐겁고 안전한 화학 실험 교실이 될 수 있다”고 했다. 학생들은 집에서 요리를 복습하면서 건강하고 즐거운 식습관을 스스로 익힐 수 있다. 과학이 골치 아픈 과목이 아니라 평생 도움이 되는 즐거운 과목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과학이 발견한 맛의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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