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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영국 사람들이 즐겨 마시던 술은 맥주였다. 맥주보다 알코올 농도가 높은 증류주는 16세기경부터 보급되었으나, 수입품으로 가격이 매우 비쌌던 까닭에 귀족이나 부유층이 주로 마셨고 서민들은 접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18세기 초반에 진(gin)이라 불리는 값싼 증류주가 대량으로 공급되면서 영국에서는 소위 ‘진 광풍(Gin Craze)’이라 일컬어지는 알코올 과잉 섭취 열풍이 유행처럼 번져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이 현상은 1720년대 초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약 30년간 지속되었으며, 도시 빈민층, 특히 런던 빈민가를 중심으로 크게 확산되었다. 소설가 헨리 필딩(Henry Fielding, 1707∼1754)은 <최근 절도범이 증가하는 이유>라는 글에서 이러한 사회적 열풍을 크게 우려하면서, 만일 이와 같은 현상이 앞으로 20년간 더 지속된다면 진을 마실 수 있는 서민층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진, 조금만 마셔도 취할 수 있는 빈민층의 술

 

진은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처음 개발된 음료로, 맥아(malt)를 원료로 하여 만든 증류주를 노간주나무 열매로 가미하고 다시 증류하여 부드럽고 마시기 좋게 만든 술이다. 그래서 노간주나무의 이름(genèvre)에서 유래해 처음에는 지니바(Geneva)라고 불렸으며, 진(gin)이라는 이름도 이것이 변형된 것이다. 진은 영국 내에서 생산되기 전까지 네덜란드에서 수입되었기에 홀란드(Hollands)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그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1720년 즈음 영국의 증류주 생산자들은 곡물에서 맛을 어느 정도 보장할 수 있는 증류주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당시 영국의 곡물 가격이 하락하면서 보다 질 좋은 곡물을 증류주 재료로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진은 두 단계의 생산 과정을 거쳐 상품화되었다. 먼저 대규모 주조장에서 곡물을 원료로 알코올 농도가 높은 순수 증류주를 생산했다. 그러면 이 증류주를 보다 영세한 제조자가 공급받아 물에 희석시키고 설탕과 과일즙(노간주나무 열매, 아니스 씨, 체리 등에서 추출한 것)을 첨가하여 상품으로 판매했다. 이렇게 생산된 진은 마치 과일 주스 같은 맛이 나는 데다, 싼값으로 저소득층에 공급되었기에 인기가 높았던 것이다. 게다가 진은 맥주와 달리 알코올 농도가 높았기 때문에 조금만 마셔도 취할 수 있었다. 18세기 영국의 진 광풍은 이렇게 값싼 진이 다량으로 널리 보급되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윌리엄 호가스(William Hogarth), 〈진 거리Gin Lane〉, 38×32㎝, 1751, 영국 박물관 소장. 이 판화에서 호가스는 런던 빈민가 진 중독 사태의 심각성을 고발하고 있다.

 

 

얼마나 마셨나?

 

18세기 영국에 불붙었던 진 소비는 이름에 걸맞게 광풍이었다. 역사적 사료에 따르면 18세기에 진의 연간 소비량은 수백만 갤런(영국에서 1갤런은 4.55리터)에 달했다고 한다. 1700년부터 진 열풍이 나타나기 시작한 1720년 사이에 영국의 진 판매량은 두 배로 늘었다. 그리고 1729년에 와서 진 판매량은 또다시 두 배로 증가했다. 이렇게 급증하는 진 소비와 이에 따른 부작용을 막기 위해 정부는 주세를 인상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1700년에 영국에 성인 한 명이 1년 동안 마신 진은 1/3 갤런이 조금 넘었는데 30년 후에는 그것이 2.2갤런으로 일곱 배 가까이 증가했으며, 진 광풍이 절정을 이룬 1743년에는 약 8백만 갤런의 진이 소비되었다.

 

진 광풍의 심각성은 진을 소비한 계층이 극히 일부 서민층에 한정돼 있었다는 데 있다. 즉 인구가 밀집한 대도시의 저소득층, 특히 수도 런던의 빈민가에서 진이 주로 소비된 것이다. 18세기 초 런던은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였으며, 당시 60만에 육박하던 인구는 계속 늘어나는 추세였다. 지방에서 일자리를 찾아 몰려온 빈민들은 주로 런던의 동쪽 지역(East London)이나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지역에 밀집해 살았다. 이들 지역은 심한 주택난과 도시 위생 문제에 시달렸으며, 구걸과 매춘, 음주로 인한 소란 행위 등이 만연했다. 절도와 같은 각종 범죄 또한 증가하여 많은 사회적 우려를 낳았다. 그리고 진 광풍 또한 이러한 지역에서 가장 심하게 나타났다. 맥주가 광범위한 지역의 다양한 계층에서 비교적 ‘온건하게’ 소비된 점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현상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진은 주로 ‘진 숍(gin shop)’이라 불리는 곳에서 팔았는데, 이 또한 빈민가에 밀집되어 있었다. 1736년의 어느 기록에 의하면 당시 영국 전역에 진 숍이 무려 12만 곳이나 되었다고 한다. 바꿔 말하면 열 가구당 한 곳이 진 숍이었다는 뜻이다. 다소 과장된 이 기록의 정확성은 확인할 수 없으나 진을 파는 주점들이 빈민가에 밀집되었던 것은 사실이고, 이 외에도 길거리에서 무허가로 진을 판매하던 사람들도 있어 진이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술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러한 상황은 또한 가격 경쟁을 일으켜 진의 값을 내리는 데도 한몫을 하였다.

 

 

〈진 거리〉(부분). 진 숍 입구 위에 “1페니로 취할 수 있고, 2페니면 만취할 수 있다”는 문구가 있다.

 

〈진 거리〉(부분). 진 중독으로 죽은 한 여인을 관에 넣고 있으며, 옆에는 그 여인의 자식으로 보이는 어린아이가 방치되어 있다. 오른쪽의 남자는 진 중독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잔인성을 상징하고 있다.

 

진의 가격은 매우 싸서 1페니면 진 1/4 파인트(약 142밀리리터로, 오늘날 사용하는 30밀리리터짜리 스트레이트 잔으로 넉 잔 넘게 마실 수 있는 양)를 살 수 있었는데, 이는 작은 빵 한 덩어리의 값과 같았다. 진 광풍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화가 윌리엄 호가스(William Hogarth, 1697~1764)가 그린 〈진 거리(Gin Lane)〉라는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을 보면, 주점은 “1페니로 취할 수 있고, 2페니면 만취할 수 있다”는 광고까지 내붙일 지경이었다. 맥주를 대량으로 마셨던 영국인들에게 술에 취한 사람들의 모습은 새로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강한 알코올에 익숙하지 않았던 영국 서민들은 진을 맥주 마시듯이 마셨고, 심지어는 내기를 하면서 진 4파인트(약 2.27리터)를 연속으로 들이킨 사람이 죽었다는 기록도 있다. 더욱이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았던 대부분의 도시 빈민들은 이렇게 강한 술을 견뎌낼 수 없었고, 그래서 더 빨리 취했을 뿐만 아니라 건강도 급속히 악화되었다. 이렇게 만취한 사람들을 위해 2페니 정도의 돈만 내면 술이 깰 때까지 잠을 재워주는 방도 등장했으며, 여러 사람이 빽빽이 누워 자던 이런 방이 항상 만원이었다는 사실에서 이 진 광풍이 얼마나 심각한 사태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런 방을 이용할 형편이 못 되는 사람들은 흔히 길거리에 쓰러져 잤으며, 지나가는 마차에 깔리거나 하수구에 빠져 변을 당하는 경우도 흔했다. 헨리 필딩은 진이 이들의 주식(主食)이었다고 묘사했으며, 기록에 의하면 진 광풍이 한창일 때 우유 소비량이 줄었다고 한다.

 

 

〈진 거리〉(부분). 진 광풍으로 인한 사업실패로 자살한 사람을 그리고 있다.

 

〈진 거리〉(부분). 진을 사기 위해 전당포에서 목수는 공구를, 여인은 가사 도구를 전당 잡히고 있다.

 

 

진과 여성

 

진 광풍의 또 하나 특이한 점은 진이 저소득층 여성들에게 매우 인기 있는 술이었으며, 여성들이 진의 소비자일 뿐만 아니라 판매자로도 등장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진은 ‘여성들의 기쁨(the Ladies’ Delight)’, ‘마담 지니바(Madam Geneva)’ 혹은 ‘진 어머니(Mother Gin)’와 같은 이름으로도 불리었다. 여성들이 진을 판매할 수 있었던 이유는 비교적 적은 돈으로, 단속의 손이 잘 미치지 않았던 빈민가에서, 무허가 노점상을 할 수 있었던 데 있다. 이처럼 저소득층 여성이 무방비 상태로 진에 중독되자, 이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진 가게에서 여성이 남성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 것은 전에 못 보던 모습으로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더욱이 임산부나 유모의 진 중독은 태아나 어린아이의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기에 더욱 심각한 우려를 자아냈다.

 

<진 거리>의 중앙에는 다리에 상처를 입은 여인이 아이가 계단 아래로 떨어지는 것도 모른 채 진에 만취한 상태로 앉아있다.

 

〈진 거리〉(부분). 여성들이 진을 마시고 있는 판화의 부분. 한 여인은 어린아이에게도 진을 먹이고 있다.

 

호가스의 그림 〈진 거리〉의 중앙에는 진에 만취한 한 여인이 무릎에 있던 아이가 계단 아래로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퍼질러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여성의 다리에는 성병의 증상으로 보이는 염증이 있는데, 이처럼 진에 중독된 여성은 성적으로 문란하거나 매춘 등에도 노출돼 있다고 여겼다. 가임기 여성이 진에 중독된 경우, 병약한 아이를 출산한다는 점도 우려의 대상이었다. 당시 여러 식민지를 거느리고 제국으로 발돋움하던 영국은 군인과 노동자 등 많은 인력을 필요로 했다. 그러한 측면에서, 미래의 노동력인 아이들의 건강을 위협하는 진 광풍은 막대한 국가적 손실을 초래하는 일이었다. 이렇듯 저소득층의 주 음료가 된 진은 지배층에게는 혐오와 우려의 대상이었다. 그리하여 진 판매를 규제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는 가운데 정부는 1729년부터 1751년 사이, 수차례에 걸쳐 각종 규제와 법안을 통과시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진 규제법(Gin Acts)

 

진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진 중독이 사회적 질서를 위협하는 것으로 보았다. [로빈슨 크루소]의 저자 대니얼 디포(Daniel Defoe, 1660~1731)는 이미 1727년에 진 판매를 규제할 것을 주장했다. 영국의 지배 계층은 진에 찌들어 통제가 불가능해진 저소득층과 빈민층의 불만이 폭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동시에, 진을 매춘, 살인, 절도 등 각종 범죄를 증가시키는 원인이라고 보았다.

 

무분별한 진 소비와 무허가 진 판매를 막기 위해서 영국 정부는 수차례에 걸쳐 주세(酒稅) 인상과 진 판매 허가제, 무허가 판매 단속 등 각종 규제 조치를 시행했으나, 18세기 중반까지는 큰 성과가 없었다. 그런데 진 광풍 뒤에는 몇 가지 복합적인 정치ㆍ경제적 요인과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우선 주류에 부과된 세금은, 당시 프랑스와 전쟁 중이었고 이로 인해 재정난을 겪고 있던 영국정부에 매우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또한 영국의 양조업체는 막강한 세력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들 뒤에는 증류주의 주원료인 곡물을 제공하는 지주들이 버티고 있었으며, 특히 곡물 가격이 하락세를 보이던 18세기 초에 진 생산은 곡물 가격을 높게 유지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처럼 진 뒤에는 정부와 의회에서 막강한 세력을 행사하던 집단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으며, 이런 복합적인 관계는 진 판매에 대한 정부의 규제가 단순히 진의 소비를 줄이는 데만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1729년부터 통과된 일련의 법이 효과를 보지 못하고 무허가 진 판매가 난무하자 1736년, 영국 의회는 획기적인 조치를 취했다. 진을 포함한 모든 주류에 부과된 세금을 인상하고, 진을 판매하려면 50파운드라는 천문학적인 영업 허가료를 내도록 하는 법을 통과시킨 것이다(당시 세관 직원의 연봉이 50파운드 정도였다). 이 법은 서민들에게 엄청난 반발을 샀다. 런던에서는 “진 없이는 국왕도 없다(No gin, no King)”는 구호와 함께 일련의 폭동이 일어났으며, 이 법을 풍자하는 [진 여왕의 폐위와 죽음(The Deposing and Death of Queen Gin)]이라는 극작품까지 등장했다. 결국 현실성 없는 이 법은 1743년에 폐지되었고, 영국 정부는 1751년에 마지막 진 규제법을 통과시키면서 진에 대한 과세를 올리고 판매 규제를 강화했다.

 

 

작자 미상, <마담 지니바의 불행한 추락(The Lamentable Fall of Madam Geneva)>, 34.6×29.6㎝, 1736, 영국 박물관 소장. 1736년 영국정부가 진 판매를 규제하기 위해 강력한 조치를 취하자, 서민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같은 해에 그려진 이 판화는 그 당시 정부가 취한 규제를 풍자하고 있다.

 

 

그러나 마지막 진 규제법이 통과될 즈음, 진 소비는 처음으로 감소세를 보이기 시작하면서 진 광풍은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18세기 후반에는 그 같은 감소세가 더욱 가팔라져, 1인당 연간 진 소비량이 0.6갤런(약 2.73리터) 정도에 머물면서 안정적인 소비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진 광풍이 이렇듯 수그러든 것은 정부의 법이 효력을 발휘한 때문만은 아니었다. 18세기 중반 영국은 몇 차례나 심각한 흉작을 겪었으며, 이는 곡물가격을 상승시켰다. 동시에 18세기 중반부터 인구 증가로 인해 저소득층의 평균 임금이 하락하면서 진의 주 소비자였던 빈곤층의 경제적 형편이 더 어려워졌다. 여기에 진이 온갖 범죄와 성적 문란, 무질서 등을 조장하여 사회의 안정을 해친다는 이유로 반(反)음주 운동에 적극적이었던 개혁파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18세기 영국의 진 광풍은 복합적인 성격을 띤 현상으로, 마치 현대사회의 마약중독과도 같은 일종의 신드롬이었다. 이는 도시 빈곤층 형성, 중독성 물질의 대량생산과 유통, 범죄, 국민 건강 문제 등 도시화된 현대문명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각종 사회적 문제들을 일찍이 예고한 현상으로 주목된다.

 

‘18세기의 맛’은 한국18세기학회의 기획으로서, 문학동네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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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경 /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영문학으로 학사를 받고 동 대학에서 석ㆍ박사를 취득했다. 르네상스와 17ㆍ18세기 영문학을 전공했고, 저서로 [고전영문학의 흐름] 등이 있다. 한국18세기영문학회장, 한국18세기학회장을 지냈으며, 현재 한국중세르네상스영문학회 회장으로 있다.
 
발행 2012.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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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호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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