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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의 주산지인 전라도가 명산지로 알려진 술, 죽력고(竹瀝膏). 죽력은 간, 심장, 위, 폐 등의 질환에 작용하는 치료제로도 사용된다.

 

 

명약주로 널리 화자된 죽력고

앞서 소개한 관서감홍로와 이강고에 이은 ‘조선 3대 명주’의 한 가지는 전라도지방의 죽력고이다. 일반적으로 죽력(竹瀝)이라고 하는 것은, 푸른 대(靑竹)의 줄기를 숯불이나 장작불에 쪼여 흘러나오는 수액같은 기름(膏)을 가리킨다. 이 죽력은 ‘죽즙(竹汁)’, ‘담죽력(淡竹瀝)’으로도 불려지고 있어, 그 성질이나 형태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죽력을 섞어서 증류한 소주를 죽력고(竹瀝膏)라고 하며, 한의학에서는 이 죽력고를 만들 때 생지황, 꿀, 계심, 석창포 따위와 함께 조제하여 아이들이 중풍으로 별안간 말을 못할 때 구급약으로 쓴다고 알려져 있다. 전통적으로 알려져 온 최고급 상품의 술로, 죽력고는 술의 주재(主材)가 대나무에 있으므로 대나무의 주산지인 전라도가 명산지로 알려져 왔다.

 

이러한 죽력고가 그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소위 ‘녹두장군’으로 불렸던 전봉준(全琫準, 1853~1895)과 관련된 얘기가 세간에 회자되면서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전하는 얘기로, 조선 말기의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이 쓴 [오하기문(梧下奇聞)]에 “전봉준이 관원에게 사로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여 만신창이가 되었는데, 지역 주민들이 이 사실을 알고 죽력고를 가져다 마시게 했으며, 죽력고 3잔을 마시고는 몸이 나았으며, 수레 위에서 꼿꼿하게 앉은 채로 서울로 압송되었다.”는 것이 그 요지이다. 이후 ‘죽력고는 멍들고 병든 몸을 추스르는 이만한 약도 없다’ 하여 명약주로 널리 회자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죽력은 간과 심장, 위, 폐 등의 질환에 작용하여 치료제로 사용되는데, [별록(別錄)]에는 “갑작스런 풍사의 침법으로 저리고 흉부에 열이 심한 증상을 치료하고, 가슴이 번잡하고 답답한 증상과 갈증을 해소한다.”고 전하며, [본초강목]에는 “임신으로 인한 어지럼증과 중풍증상을 치료하며 초오(草烏)의 독을 푼다. 혈압을 다스리고 중풍 등 혈관관계 질병과 기관지천식, 어혈을 풀고, 뇌졸중으로 인한 언어장애와 해열작용에도 효과가 있다.”고 전해온다. 특히 조선 중기 1766년에 발간된 [증보산림경제]를 비롯하여 1827년 간행된 [임원십육지], 그리고 1924년 출판된 한글조리서인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도 죽력고의 제조법과 효능에 대해 언급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증보산림경제]와 [임원십육지]에 수록된 죽력고의 주방문(酒方文)을 보면, “죽력을 꿀과 소주를 적당히 넣어 항아리에 담고 끓는 물에 중탕한 다음, 꺼내어 사용한다. 혹 생강즙 약간을 넣어도 좋다.”고 하여 그 제조법이 매우 간단하다. 하지만 훨씬 후의 기록인 1924년의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의 주방문은 “죽력과 꿀을 마음대로 소주병에 넣고 중탕하여 쓰는데, 강즙(薑汁)을 넣어도 좋으니라. 죽력은 법제(法製)로 내야 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죽력은 대나무의 진액을 가리키는데, 이 죽력을 얻는 간단한 방법으로 푸른 대나무를 마디마디 잘라서 마디의 한 가운데를 숯불로 달구면 마디의 양 옆으로 눈물같은 죽력이 새어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하여 필요한 양의 죽력을 얻으려면 대나무의 소요량도 많거니와 하루이틀에는 마칠 수 없다. 한편 법제한 죽력을 얻기는 이보다 까다롭다. 이를 보아 죽력고가 그 제조과정이 까다롭다고 하는 데에는 주재료라고 할 수 있는 ‘죽력’의 제조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나무와 죽여(속껍질). 30~40cm 길이로 잘라 쪼개 사용한다.

 

 

길고 힘든 제조과정을 거쳐 탄생되는 죽력고

한편, 누대에 걸친 전승 가양주로 양조되어 오다가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의 가양주 제조금지와 밀주단속으로 말미암아 단절된 후 최근 복원되어 상품화된 전라도 태인지방의 죽력고가 있다. 그 기능을 보유하고 있는 송명섭(52세,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6-3호)에 의해 복원된 죽력고의 주방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대밭에서 청죽을 마디마디 잘라 다시 여러 조각으로 쪼갠 대나무를 항아리 안에 채곡채곡 채운 뒤, 같은 크기의 항아리에 엎어서 올린다. 항아리의 입구 사이를 젖은 한지로 메우고 황토를 개서 항아리 몸 전체를 발라준다. 땅바닥에 콩대를 깔고 황토 바른 항아리를 올린 다음, 그 주변에도 쌓아 올린 후 불을 붙여 불기운이 항아리를 덥히도록 한 후에 왕겨로 두텁게 항아리를 완전히 덮어준다. 이때 왕겨 속의 콩태에 붙은 불은 일정량의 산소를 공급받을 수 있기 때문에 꺼지지 않고 계속해서 시름시름 타오르게 되고, 위쪽의 대나무조각을 채운 항아리 주변을 일정한 온도로 덥히게 되는데, 그 뜨거운 열로 인하여 대나무의 수액이 빠져 나오게 되고 밑에 밭쳐 둔 항아리 안으로 고이게 된다. 이와 같은 작업은 3일~5일간 진행되는데, 중간에 눈, 비로 인해서 불이 꺼지거나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불길이 솟아올라서는 망치게 되므로, 질 좋은 죽력을 얻기 위해서는 불을 잘 조절하는 일 못지 않게 더러 날씨 선택이 중요한 관건이 되기도 한다.

 

죽력을 만들기 시작한지 3~4일이 지나 왕겨의 불이 스스로 다 꺼지면 작업이 끝나는데, 항아리가 완전히 식기까지 하루 정도를 더 기다려야 한다. 항아리가 다 식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항아리에 발랐던 황토를 털어내야 항아리가 깨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지난한 작업 끝에 엷은 보리차 색깔의 죽력을 얻을 수 있는데, 정작 죽력고 제조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죽력고를 빚기 위해서는 소위 ‘기주(起酒)’가 필요하다. 감홍로나 이강고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기주는 소위 소주의 원료주(술밑)를 지칭하는데, 특별한 방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상법(常法)으로 발효시킨 술이면 된다. 상법의 술은 흔히 ‘멥쌀을 백세하여 물에 담가 불렸다가 다시 씻어 건져서 고두밥을 짓고, 고두밥이 식으면 누룩과 물을 적당량의 비율로 섞고 발효시켜’ 술밑을 빚는다. 그리고 술밑은 한 차례로 끝내기도 하고 두세 차례 빚기도 하며, 양조횟수를 거듭할수록 좋은 소주를 얻을 수 있다.’ 다만, 소주를 많이 내야 하므로, 일반적인 주방문보다 누룩의 사용량이 많아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하여 발효가 되면 3~5일간 숙성을 시킨 후에 청주나 탁주, 막걸리를 만들어 가마솥에 담아 안치고 불을 지펴 술을 끓인다. 이어 솥 위에 소줏고리를 앉히게 되는데, 이때 솔잎과 죽엽·생강·계피·석창포 등의 약재를 먼저 만들어 둔 죽력에 흠씬 적셔서, 소줏고리 몸 안의 빈 공간에 가득 채운 다음, 술이 끓고 있는 솥 위에 앉히고, 소줏고리 위에 냉각수 그릇을 올려놓는다. 그리고 솥과 소주고리, 소주고리와 냉각수 사이의 틈새는 밀가루를 반죽하여 소줏번(밀가루반죽)을 붙여 증류시 기화(氣化)된 알코올이 새어 나오는 것을 막아주어야 한다. 이제 죽력고를 빚을 수 있는 준비가 모두 끝난다. 보통 증류할 술이 1말(18L)이면 증류과정을 통하여 대략 30%~35%의 증류식 소주 5.4~6L를 얻을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증류된 죽력고는 ‘울창한 대숲에서 느끼는 죽풍의 상쾌한 느낌의 향기와 시원하면서도 부드러운 맛, 그리고 마시고 난 뒤의 은은한 흥취를 주는 술’로, 고도주를 선호하는 일부 현대인들의 취향에도 잘 어울린다는 평을 듣고 있다.


대나무에 불을 쬐이면 그 열로 수액인 죽력이 추출되게 된다.

 

감홍로, 이강고, 죽력고는 과음을 해도 어느 정도까지는 취하지만 필름이 끊기는 현상 같은 부작용이 없고, 다음날에도 몸이 오히려 개운해지는 느낌 때문에 이를 알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꾸준하게 인기를 끌고 있다는 반응이다. 육당 최남선이 이들 주품에 대하여 ‘조선 3대 명주’라는 작위를 부여하게 된 이유가 다름 아닐 것이다. 그가 이들 주품에 대하여 어느 정도 섭렵했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 수 없어 뭐라고 단정할 수 없지마는, 필자의 견해로는 그의 술에 대한 이해나 지식이 상식이 아닌 혜안을 지녔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제 와인이나 맥주, 사케에 쏟았던 관심만큼만 우리 전통주에 기울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확한 근거나 이유 없이 그저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라는 구태의연한 얘기가 아니라, 보다 차별화, 개성화를 추구하고 있는 세계화 속에서 우리 전통주가 양주와 어떻게 차별화되고, 또 어떤 다른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를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무시’를 당하지 않는 길이자, 그것이 곧 전통주의 브랜드 가치를 부여하는 수단이 되기에 하는 말이다.

 

 

 

 

박록담
시인, 한국전통주연구소장, 숙대 전통문화예술대학원 교수.

발행일  2012.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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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호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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